등록 : 2016.12.08 19:41
수정 : 2016.12.21 14:28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15) ‘신학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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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 지성사의 금자탑인 <신학대전>을 들고 있는 토마스 아퀴나스. 카를로 크리벨리, 1476년,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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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을 올바르게 형성해야 할 책임을 진다.” 스콜라 철학의 완성자라 불리는 토마스 아퀴나스(Thomas Aquinas, 1224/5~1274)는 단순히 “양심을 따르라”고 가르친 것이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를 형성할 책임도 요구했다. 이 가르침의 중요성은 현재 우리나라 상황에서 더욱 분명해진다. 국가 전체를 혼란에 빠트리고서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를 모르는 대통령과 무조건 이를 감싸는 맹목적인 추종자들이 건재하기 때문이다. 이 상황을 바라보면서 과연 이들이 ‘양심’을 지니고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워진다. 양심의 가책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이들에게서는 당연히 부끄러움의 흔적도 발견할 수 없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와 유사한 이들을 ‘이완된 양심’을 지니고 있다고 비판했다. 이와 대조적으로 사실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지나치게 양심의 가책을 느끼거나, 불가항력의 상황에 대해서까지 자책하는 이들은 ‘완고한 양심’을 지닌 것이다. 토마스는 이완된 양심과 완고한 양심이라는 극단적인 경우들을 피해 중용의 길을 찾아 ‘올바른 양심’을 형성하는 것이 윤리적인 의무라고 강조했다. 이렇게 현대 사회에서도 필요한 구체적인 윤리적 통찰로 가득 찬 책이 바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주저인 <신학대전>(Summa Theologiae)이다. 이 책은 왜 “서구 지성사의 금자탑”이란 평가를 받게 되었을까?
<신학대전>의 특징과 형식
<신학대전>은 우선 그 분량 자체에서 일반인의 상상을 초월한다. 이 책은 영어 번역본의 경우 60권에 달한다. 주제를 다루는 형식도 독특한데, 일반적으로 <신학대전>이라는 제목에서 떠올리는 것처럼 성경과 이에 대한 설명이 주를 이루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책은 당대에 유행했던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의 개념과 논증방식으로 가득 차 있다. 따라서 그리스도교 신앙이 없이 이성만을 지닌 채 <신학대전>을 읽더라도 상당 부분을 공감하며 따라갈 수 있다. 물론 일정한 논의가 진행된 후부터 토마스는 종종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시했던 철학적인 차원을 넘어선다. 이를 기초로 그리스도교 교리가 가르치는 핵심적인 내용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두 가지 차원은 서로 배척하거나 상충하는 것이 아니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토마스가 이런 방식으로 저술할 수 있었던 것은 “은총은 자연을 파괴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한다”(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토마스 아퀴나스 윤리적 통찰
‘서구 지성 금자탑’ 이룬 대작
자연법 어긋난 “악법”에 대해
국민들은 정당한 저항권 가져
‘신앙과 이성의 조화’ 목표 추구
‘중세는 암흑’ 관념 명백히 반박
<신학대전>의 내용 중에는 “다섯 가지 길”(Quinque viae)이라는 신존재 증명이 가장 유명한 편이다. 그러나 “신은 존재하는가?”라는 질문은 토마스가 <신학대전>에서 다룬 4000개가 넘는 질문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 각각의 질문은 “논박될 이론들-이에 대한 짧은 반론-절의 본문(corpus articuli)-논박될 이론들에 대한 해답”이라는 일정한 순서와 틀에 따라 논의된다. 이러한 형식은 중세 대학에서 유행했던 정규 토론(disputatio ordinaria)에서 얻은 성과를 토마스가 의도적으로 축약한 것이다. 머리말에 따르면, <신학대전>은 인문학부를 마치고 신학부로 올라오는 초심자를 위해서 저술되었다. 따라서 토마스는 지루함을 불러일으키는 중복을 최소화하고 가장 강력한 논변들만을 골라 지금의 형태로 압축했다. 그럼에도 신학 초심자들이 60권에 달하는 분량을 보았을 때 어떤 표정을 지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다루는 주제가 워낙 방대하기 때문에 <신학대전> 전체는 3부로 나누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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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리하는 교회’의 중심에 앉은 토마스 아퀴나스. 안드레아 디 보나유토, 1366년, 피렌체, 산타 마리아 노벨라 대성당 내 스페인 경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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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는 <신학대전> 제I부에서 신론, 삼위일체론, 창조론 등을, 제Ⅲ부에서는 그리스도론과 성사론 등 신학적인 주제를 다룬다. 여기서 그는 개별적인 주제에 관해 고대철학부터 13세기까지 논의된 거의 모든 견해들을 매우 효율적으로 요약하고 엄격하게 평가한다. 그 개별적인 논의들이 놀라울 정도로 유기적인 체계로 연결되어 있다. <신학대전>에서 이루어진 체계적인 종합은 거대한 고딕건축에 비교되며 읽는 이를 감탄하게 만든다. 특히 제Ⅱ부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가지지 않은 이들도 많은 영감과 통찰을 얻을 수 있는 윤리학과 관련된 주제들로 가득 차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통합적인 윤리학
아름다운 고딕성당을 감상하는 마음으로 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학에 구체적으로 다가가 보자. 토마스는 윤리학에서 종종 가장 중요한 원리가 무엇인지에 따라 구분되는 주지주의와 주의주의 양측의 입장을 모두 수용하고 있다. 그는 주관적 기준으로서 ‘의도’(intentio)가 올바를 때에만 윤리적 행위가 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의도란 경향에 불과한 것이 아니라 지성으로 동의한 의지를 말한다. 그러나 올바른 의도는 윤리적 행위의 필수조건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다. 토마스에 따르면, 이 의도가 모든 인간이 동의할 수 있는 이성의 명령, 즉 ‘자연법’(lex naturalis)에 부합할 때에만 윤리적 행위가 될 수 있다. 또한 자연법은 신의 지성을 뜻하는 ‘영원법’에 기초하고 있다. 이와 유비적으로 인간들이 제정한 ‘인정법’(人定法)은 자연법에 기초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만일 통치자가 자연법에 어긋나는 법을 제정하여 국민을 억압하려 한다면, “그런 악법은 법도 아니기” 때문에 국민들은 정당한 저항권을 지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전범들이 나치 시대에 만들어진 독일 실정법을 준수했다고 주장함으로써 처벌을 피하려 했다. 그러나 전범들이 죄 없는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죽인 것은 ‘자연법’에 어긋나기 때문에 결코 정당화될 수 없다는 반론이 제기되어 이들을 처벌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과연 주관적 의도와 객관적 기준인 자연법이 상응하는지를 어떻게 판가름할 수 있는가? 이를 판가름하는 법정이 곧 ‘양심’인 셈이다. 그런데 사람들은 언제나 이 모든 기준을 일일이 검토하면서 행동할 수가 없다. 따라서 토마스는 전통적인 가르침에 따라, 언제든지 필요한 상황이 되면 올바르게 행동할 수 있는 습관, 즉 ‘덕’(virtus)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지혜, 용기, 절제, 정의라는 플라톤의 4주덕과 아리스토텔레스의 중용은 물론이고, 성경에서 강조하고 있는 믿음, 소망, 사랑이라는 신학적인 덕을 하나하나 매우 상세하게 설명했다. 더욱이 이들과 반대되는 나쁜 습관, 즉 ‘악덕’들도 자세히 다루며 이를 극복할 수 있는 실천적인 방안까지도 제시했다. 이 모든 조건을 충족시켰다고 하더라도 만일 어떤 행위가 진정으로 윤리적이려면, ‘구체적인 상황’에 적절하게 어울려야 한다.
통합적인 토마스 아퀴나스의 윤리학은 우리나라에서 현재 논란이 되는 상황에 대한 윤리적 성찰을 불러일으킨다. 예를 들어, 대통령이 “아무런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다”며 순수한 의도를 강조한다고 해도 자신의 행위들에 대한 윤리적 책임을 면할 수 있을까? 그 행위가 국정농단과 무수한 비리를 낳았다면, 과연 자연법과 올바른 양심에 부합한 행위인지 진지하게 반성해야 한다. 또한 일반인이 7시간 동안 휴식을 취하거나 ‘미용시술’을 받았다고 도덕적 질책을 받을 이유는 전혀 없다. 그러나 300명이 넘는 국민들을 구해야 할 절체절명의 ‘상황’에, 이를 진두지휘해야 할 대통령이 이와 유사한 행위를 하고 있었다면 이는 과연 용납될 수 있을까? 대통령이 무능과 아집으로 저지른 다른 행위들도 지혜, 정의, 믿음, 사랑 등의 덕과 연관시켜서 그 도덕성을 비판적으로 성찰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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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 제II부 제1권, 벤체슬라우스 크리스푸스 필사, 양피지, 나폴리, 148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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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리학이라는 한 영역의 가르침만 개괄해 보아도, 우리는 고대철학과 교부철학의 수많은 지류들이 몰려들어 <신학대전>이라는 하나의 커다란 저수지를 이루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시종일관 ‘신앙과 이성의 조화’라는 목표를 추구했다. <신학대전>이 도달했던 높은 수준의 지성적 논의는 중세가 단순히 신앙만을 강요했던 암흑의 시대가 아니었음을 웅변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아직도 현대의 많은 학자들이 다양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이 풍부한 수원으로부터 신선한 영감을 공급받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토마스 아퀴나스의 가르침에 따라 모든 정치가와 국민이 ‘올바른 양심’을 형성할 책임을 자각할 수 있기를 기대해본다.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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