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1.19 19:33
수정 : 2017.01.19 20:21
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18) 언어와 권력
|
단테와 <신곡>, 도메니코 디 미켈리노, 1465년, 피렌체 대성당. 단테는 왼손으로 <신곡>을 들고 있고 오른손으로는 지옥으로 내려가는 죄인들을 가리키고 있다. 배경으로 연옥과 피렌체 시내가 보인다.
|
최근에 한국의 대학들은 영어로 하는 강좌를 많이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대학 평가 순위를 높이고 국책 사업에 선정되기 위한 노력이다. 그 배경에는 영어 강좌가 글로벌 시대에 적합하고 각 대학의 경쟁력과 우수성을 나타내는 잣대라는 생각이 깔려 있다. 그러나 학생들은 여러 이유로 영어 강좌를 기피하고, 어쩔 수 없이 영어로 강의하는 교수들도 그 효과를 의심하고 있다. 영어 강좌의 개설을 강요하는 분위기에 대해 깊이 있는 성찰이 필요한 때이다. 이렇게 영향력이 커진 영어가 도달하고 싶은 절대적 위치에 이미 도달했던 언어가 있었으니, 그것이 곧 중세 시대의 라틴어이다. 로마 제국의 공용어였으나 사어(死語)로 전락했던 라틴어가 어떻게 중세 시대에 그렇게 강력한 힘을 지니게 되었을까?
교회와 학문의 언어가 된 라틴어
5세기 게르만족의 이동으로 서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소위 ‘이해할 수 없는 말을 하는 이들’(barbarian)이 정치적 주도권을 잡았다. 로마인이 피지배 민족으로 전락하자 라틴어도 구어(口語)로만 사용되면서 점차 죽은 언어(死語)가 되었다. 그런데 자칫 역사 안에서 사라질 뻔한 라틴어는 의외의 방식으로 살아남았다. 게르만족이 그리스도교로 개종하면서 전 유럽으로 수도원이 퍼져 나갔는데, 그 수도원에서 기도와 성경 연구를 위해 계속 라틴어를 사용했던 것이다. 수도원 학교에서는 라틴어를 일상생활을 위해 사용하지는 않았지만 문어(文語)로서 읽고 쓰기를 가르쳤다. 이렇게 부활한 라틴어는 카를대제(Karl der Große, 742∼814)의 교육 개혁을 통해서 학문용어로 자리 잡았다. 개혁을 주도한 앨퀸은 라틴 문헌을 보존했고, 라틴어를 체계적으로 교육할 기초를 마련했다. 이 과정에서 예전에 산발적으로 사용되던 지역 라틴어가 교과서와 법령에 사용될 공식 라틴어로 통합되었다. 이로써 라틴어는 서유럽 전체의 공용어 및 외교어로 정착했다.
중세 라틴어 사용의 빛과 그림자
13세기 무렵 서양 최초의 대학들이 설립되면서 라틴어는 영향력을 확대할 기회를 얻게 되었다. 유럽의 모든 대학에서 강의가 라틴어로 이루어졌다. 교수들이 볼 때 대학의 모든 가르침은 성스러운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세속적인 지방 언어로 교육해서는 안 되었다. 더욱이 라틴어는 이미 오랫동안 교회의 언어, 신학의 언어였다. 그래서 교황은 교황청 직속 대학들이 라틴어를 사용하도록 적극 장려했다. 이처럼 중세의 라틴어는 단순히 학문을 배우고 가르치는 수단이 아니라 그 시대의 이상과 가치를 담고 있었다. 또한 공통의 언어와 커리큘럼 덕분에 중세의 ‘자유로운 지식인’들은 이 나라의 대학에서 저 나라의 대학으로 자주 이동했다. 학생이든 교사든 다른 대학으로 옮기더라도 그때까지 배운 지식이나 획득한 교수법을 쉽게 활용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인들은 서유럽 전체의 문화적 동질성을 유지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중세 라틴어에는 분명히 한계도 있었다. 지역에 따라서는 문맹률이 90%를 훌쩍 넘었다. 따라서 라틴어 사용자는 종교인과 일부 세속적인 지식인에 국한되어 있었다. 또한 라틴어가 학문의 언어가 된 이유는 라틴어로 기록된 그리스도교 문헌과 그리스-로마 문화를 대표하는 고전들이 지혜의 원천으로 이상화되었기 때문이다. 이런 고전들이 영원하고 보편적인 이상을 지녔다고 칭송되면서, 개별적인 지역 문화들은 종종 폄하되곤 했다. 이상화된 고대 문화 앞에서 스콜라 학자들은 열등감을 느꼈다. 12세기에 그들이 고대 문헌들을 집중적으로 연구하게 되었을 때, 고전 라틴어를 그대로 모방함으로써 현학적이고 어색한 라틴어를 유행시켰다.
라틴어, 교회·학계 영향력 유지
아퀴나스 ‘신학대전’ 대표적 사례
고대와 중세 연결하고 상호소통
특정 국가 지배력 대변하지 않아
중세 후기 지성계, 지역언어 보존
‘영어 만능’ 요즘 학계와 차이 커
중세 라틴어 사용의 그림자가 짙어지면서 이를 극복하려는 노력도 등장했다. 13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 등 연구해야 할 내용이 폭발적으로 늘어나자, 학자들은 ‘간결하고 정확하게 학문적 내용을 전달’하려는 목적으로 라틴어를 사용했다. 이렇게 ‘간결한 라틴어’를 사용한 대표적인 예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학대전>이다. 14세기 이후 고유한 문화에 자부심을 지닌 지식인들(단테, 루터, 데카르트 등)이 지역 언어로 책을 쓰는 일이 늘어나면서, 라틴어는 독점적인 지위를 위협받게 되었다. 하지만 이 과정은 매우 느리게 진행되었다. 그래서 초기 작품을 라틴어로 쓴 칸트가 살았던 18세기 중반까지 학술적 문헌을 라틴어로 기록하는 관행이 이어졌다.
|
카를 대제가 개혁한 소문자로 쓰여진 루카복음, 런던, 영국도서관 수사본 11848.
|
중세 라틴어와 현대 영어의 차이점
중세 서구에서 라틴어가 맡았던 역할을 요즘에는 영어가 맡고 있는 형국이다. 그러나 영향력이 막대한 보편적 언어라는 면에서는 동일해 보이더라도, 그 상황과 배경은 매우 다르다.
라틴어 이후 일시적으로라도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이 컸던 언어는 스페인어였다. 스페인어는 짧은 시간 안에 방대한 식민지에서 사용되는 제국의 언어가 되었다. 이어서 대영제국이 식민지를 확장하자, 영어를 사용하는 지역이 급속히 팽창했다. 프랑스, 독일 등도 제국주의의 대열에 합세했고, 이와 동시에 유럽 각 지역의 언어에 대한 연구도 활발해졌다. 이런 변화 안에서 라틴어가 아니라 지역 언어를 통해 개별 민족이나 국가의 정체성과 자존심을 세울 수 있다는 자신감이 생겨났다.
근대 이후의 지역 언어가 특정 국가권력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발전한 데 비해, 중세 라틴어는 적어도 한 국가나 민족의 이익을 대변할 위험성은 적었다. 사어가 된 라틴어는 모든 이에게 동등하게 “외국어”였던 것이다. 단지 새로운 지식을 얻고자 하는 열망을 지닌 자들이 국가나 민족의 간섭 없이 중세 학교(Schola)에서 라틴어를 배우고 가르쳤다. 이 시대에 라틴어는 고대와 중세를 이어주고, 가치를 대변하고, 이상을 지켜주었다. 또한 개별 국가나 특수 집단의 한계를 넘어서 모든 지식인들이 상호소통하는 역할까지 해냈다.
|
단테의 <신곡> 인쇄본 초판의 제목 페이지, 1472년 인쇄, 이탈리아 폴리그노, 트린치 궁전 소장. 이 작품은 라틴어가 아니라 토스카나 방언으로 적혀 이탈리아어의 생성과 발전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
외국어 교육과 고유문화에 대한 자부심
중세 라틴어는 고대 학문에 담긴 보편적 이상을 수용하는 수단인 동시에 세계와의 소통 가능성도 높여 주었다. 이처럼 외국어를 잘한다는 것은 어느 시대에서나 중요하고 권장할 일이다. 물론 우리나라에서도 시간과 공간을 넘어 소통할 수 있도록 외국어 교육이 필요하다. 그렇지만 국가가 대학에게 학문 분야와 관계없이 영어를 사용하는 강좌를 종용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이다. 대부분의 점령지역에서 아직도 대표적인 공용어로 쓰이는 스페인어, 영어, 프랑스어 등의 언어들은 제국주의의 역사적 잔재인 셈이다. 더욱이 우리나라는 일본 제국주의에 의해 일어 사용을 강요당했던 역사를 체험했다. 현대 사회에서는 이러한 강요는 사라졌지만 세계를 지배하는 신자유주의가 더욱 교묘한 형태로 영어의 사용을 부추기고 있다. 그래서 일부학자는 영어 강좌를 종용하는 경향을 “글로벌이란 개념에 대한 환상과 경쟁에 대한 신념이 만들어낸 자기학대적인 현상”(서보명, <대학의 몰락>)이라고 비판한다.
영어가 만병통치약이라도 되는 듯 착각하는 현상 앞에서, 우리는 중세 후기 지성인들이 지역 언어로 저술하며 이루려던 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해야 한다. 그들은 각 지역의 개별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함으로써, 고유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주인의식을 보여주었다. 대학에서는 외국어 능력 배양에 앞서 전공분야에 대한 확실한 전문적 지식과 포괄적인 문제 해결능력을 획득해야 한다. 사회 전반에서는 국적불명의 영어를 남발하는 풍조를 피하고 우리의 고유문화를 소중하게 보존할 필요가 있다. 이것이 성공한다면, 현재 유행하는 한류 현상처럼 외국인들도 우리의 고유문화에 관심을 기울일 것이다. 중세 후기 지성인들이 주체적으로 근대를 준비하며 지역 언어로 대표되는 고유문화를 보존하려 했던 노력은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 “좋은 것만으로 이루어진 획일성보다는 다양한 것들이 어우러져 있는 것이 더욱 아름답다”(<참된 종교>, XXX)는 아우구스티누스의 말을 마음에 새겨야 하지 않을까.
박승찬 가톨릭대 철학전공 교수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