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승찬의 다시 보는 중세
(20) 연재를 마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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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 노트르담 성당의 야경. 신앙의 열기가 식은 오늘날 유럽의 고딕성당들은 신자들이 아니라 관람객들로 채워져 있다. 비록 지금의 텅 빈 성당에서는 느끼기 어렵지만, 중세인들은 신적 계시와 인간 능력의 조화를 추구했고 보편적인 이상과 개체들의 고유함을 모두 중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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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국가’ 성찰 위한 길잡이 백년지대계 학문 기초 마련한 중세
‘진리’ 중시하고 학문권 침해 땐 투쟁 ‘중세는 암흑 시대’ 선입견과 달리
인류 정신·문화 보물창고로 재고해야 우리가 연재를 통해 살펴본 중세의 사상들은 이러한 우리나라의 현실을 근본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신국론>에서 “정의가 없는 국가란 거대한 ‘강도떼’에 지나지 않는다”라고 일갈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신학대전>에서 “인간은 자기 자신의 양심을 올바르게 형성해야 할 책임을 진다”라고 가르쳤다. 이 가르침에 따라 큰 혼란을 초래하고서도 아무런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 이들은 지탄받아 마땅하다. 토마스는 이완된 양심에 기대어 뻔뻔한 태도를 유지하는 이들에게 자연법과 지혜, 정의, 믿음, 사랑 등의 덕 등을 성찰 기준으로 제시한 바 있다. 오컴은 자신의 유명론을 기반으로 보편적 가치를 외치는 모든 이에게 그 말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성찰하라고 요구했다. 더욱이 중세말기의 <죽음의 춤>은 어떠한 권력이나 명예나 부를 지닌 인간이든 죽음 앞에서는 너무나 무력하다고 가르쳤다. 그렇다면 중세 문화와 사상을 성찰함으로써 얻은 이런 단서들은 어떻게 구체적으로 우리의 현실에 적용될 수 있을까? ‘백년지대계’로서의 교육과 중세 대학 이미 1000만 참가자를 훌쩍 넘어선 촛불 집회에서 주목할 만한 현상이 있었다. 어린 자녀와 함께 참여한 가족들이 많았다는 점이다. 아마도 부모님은 자녀에게 진정한 민주주의를 교육하고 싶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스콜라철학을 태동시킨 카를 대제도 자신의 대제국이 진정으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교육이 발전해야 함을 절감했다. 그는 조급해하지 않고 나중에야 꽃피게 될 학문적 기초를 마련하여 교육이 ‘백년지대계’(百年之大計)임을 분명히 보여주었다. 또한 그의 조력자 앨퀸은 사심 없이 자신을 희생하여 교육을 쇄신했다. 이러한 교육의 발전은 12세기 말부터 설립된 중세 대학에서 풍성한 열매를 맺었다. 중세 대학은 시초부터 ‘학문과 진리에 대한 사랑’을 중시했고, 이것이 외부 권력에 의해 침해되었을 때는 ‘자유를 위한 투쟁’에 망설이지 않았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나라에서는 ‘개혁’을 주도한다던 교육부와 이를 맹목적으로 추종하던 대학 당국이 진정한 학문 발전보다는 시장 경제의 논리만을 추종했다. 결국 대학은 취업 준비 기관으로 변신을 강요받았고 기업의 논리로 운영되었다. 더욱이 예전보다 더욱 교묘하게 자본을 통해 통제됨으로써 대학은 본래 목적조차 상실하기에 이르렀다. 이제 대학교수를 비롯한 교육자들은 앨퀸과 같이 자신이 추구해야 할 이상을 뚜렷이 자각하고 눈앞의 작은 이익에만 매몰되지 않아야 한다. 한편 교육당국과 학부모는 카를대제와 같이 인내심을 가지고 교육의 열매가 숙성되기를 기다려 주어야 한다. 취업률이나 진학률과 같은 어설픈 기준으로 교육기관을 경쟁으로만 몰아가서는 안 된다. 중세 대학만 해도 공통된 라틴어를 사용하면서도 각 대학의 고유성을 유지했다. 우리도 각 교육기관의 특성을 살리면서 시너지 효과도 낼 수 있는 연구 및 교육 공동체를 새롭게 구성해야 한다. 주체의식 보존과 외래문화 수용 개방성 서구 세계가 12세기에 아리스토텔레스의 사상을 재발견했던 과정이나, 중세 후기에 라틴어 대신에 지역 언어로 저술했던 과정도 우리 사회의 문화를 개혁하는데 시사해 주는 바가 크다. 대 알베르투스와 토마스 아퀴나스와 같은 온건한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우리의 멘토가 될 수 있다. 이들은 ‘보수적 아우구스티누스주의’처럼 선입관을 가지고 아리스토텔레스의 견해를 반대하지도 않았고, ‘극단적 아리스토텔레스주의’처럼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전통에 근거한 주체의식’을 보존하면서도 ‘새로운 사상에 대한 열린 마음’을 지녔던 이들은 우리에게도 귀감이 된다. 단테와 같은 중세 후기 지성인들은 각 지역의 개별 언어로 자신의 사상을 표현함으로써, 고유문화를 보존하고 발전시키려는 주인의식을 보여주었다. 우리도 한편으로 유럽뿐만 아니라 전 세계의 다양한 문화에 대한 열린 마음을 지니고 있어야 한다. 다른 한편으로 사대주의에 빠져 국적불명의 영어를 남발하는 풍조를 피하고 우리의 고유문화를 소중하게 보존할 필요가 있다. 새로운 희망을 찾아 나서며 촛불 민심에서 드러난 바와 같이, ‘상식이 통하는 국가’가 되기 위해서는 지식인과 언론인, 그리고 종교인의 책임이 지대하다. 이제 사회 지도층은 국가 위기에 대한 공허한 핑계를 식별하고 진정한 원인을 찾아내야 한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지금도 우리에게 <신국론>을 통해 질문한다. “우리 각자는 과연 ‘정의가 실현되는 참다운 국가’와 ‘정의가 없는 강도떼 같은 국가’ 중 어디에 속하는가?” 우리나라는 놀라운 열정으로 근대화를 이루어냈다. 그렇지만 그 과정을 거쳐 오면서 유례없는 갈등에 시달리고 있다. 중세의 역사 안에서는 화합이 불가능해 보이는 의견 차이를 치열한 지성적 토론으로 극복했던 과정을 만날 수 있다. 스콜라 철학 초기에 변증론자는 이성적인 규칙에 대해 탐구하는 변증론을 바탕으로 신학적인 결론까지 확정 지으려 했다. 이에 반하여 반변증론자는 철학을 “악마의 발명품이나 신학의 시녀”라고 폄하했다. 캔터베리의 안셀무스는 ‘신앙과 이성의 조화’를 강조하여 이 논쟁을 해결했다. 12세기 아벨라르두스는 보편적 이념이 중요하다는 보편실재론과 개별적 개체가 중요하다는 유명론 사이의 대립을 해결하고자 ‘온건실재론’을 제시했다. 또한 중세 대학에서는 상이한 견해들이 열띤 토론을 통해 합의를 이루는 놀라운 성과를 거두었다. 이제 우리도 대학과 언론이 제 역할을 하면서 철저한 토론을 통해 ‘다양성 안의 일치’를 추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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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대전을 손에 든 토마스 아퀴나스. 카를로 크리벨리, 1476년, 런던 국립미술관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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