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6.02 08:24
수정 : 2016.06.03 17:00
[매거진 esc] 이동섭의 패션인문학
모든 세대는 저마다 고유한 패션 스타일을 만든다. 옷차림을 보면, 그 사람의 나이대가 쉽게 판별되는 이유다. 바지를 최대한 끌어올려 입으면 기성세대, 엉덩이 아래로 흘러내릴 듯 최대한 내려 입으면 신세대로 나뉘던 때가 있었다. 그런 유행에는 시대의 내밀한 집단 심리가 투영된다.
얼마 전까지 스키니진이 유행했다. 소녀시대 멤버들이 입고 춤추던 형형색색의 스키니진은 청춘의 생기를 상징하는 아이템이었다. 몸의 실루엣을 노골적으로 드러내 아찔한 아름다움을 내뿜지만, 혈액순환이 안될 만큼 몸을 심각하게 압착한다. 그러기에 스키니진과 아이돌은 상징적인 조합이다. 아이돌 스타는 연습생 때부터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아 그 자리에 섰다. 아름다운 몸과 노래와 연기 실력으로 추앙받지만, 그 지점에 도달하기 위해선 풀과 고구마로 이뤄진 식단을 유지하고, 휴대전화 사용과 연애를 금지당한 채 하루 12시간 이상 연습하며 수많은 연습생들의 탈락을 지켜봐야만 했다.
아이돌의 성공 방식과 마찬가지로, 스키니진 세대는 모든 것에 유능한 인재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스펙’ 경쟁으로 내몰았다. 내 현실이 참혹한 것은 모두 내 탓이니, 내가 조금 더 노력하면 성공할 수 있다고 믿었다. 이력서의 스펙은 늘어갔으나, 취직은 더 어려워졌다. 슈퍼 스키니와 울트라 슈퍼 스키니가 유행했고, 실업률은 높아만 갔다. 말하자면, 스키니진은 자기 착취를 극한까지 몰고 가는 사회의 상징물이었다.
지금은 복고 열풍과 놈코어의 영향으로 ‘찢청’(찢어진 청바지. 디스트로이드 진. 사진)이 유행이다. 헌옷 수거함에서 주워온 듯 찢기고 뜯겨 너덜너덜한 찢청 스타일링의 핵심은 허벅지, 무릎, 종아리, 발목 등을 적당한 크기와 방식으로 찢는 것이다. 스키니진 곳곳이 헐렁해지도록 구멍을 내고 찢으니, 몸은 숨을 쉬고 자유로워졌다. 의외의 곳에 드러난 맨살은 관음증을 자극하기 마련이나, 찢김의 거?이 그것을 압도한다. 내가 특히 주목하는 부분은, 칼과 가위로 마구잡이로 거칠게 잘라낸 밑단이다. 왜 실밥이 뜯어지고 길이가 불규칙한 밑단은 한국에서 더욱 유난스러울까?
지금의 20대는 단군 이래로 가장 유능한 세대이나, 거의 모든 것을 포기하고 살고 있다. 헬조선과 수저계급론을 인정하는 그들에게 삶은 버팀과 생존이다. 겨우 버티고 살아내면서 그들은, 현재의 불행이 내 탓이 아니라, 기성세대가 옹호하는 부조리한 사회구조 때문임을 깨달았다. 진짜 문제는 그때 시작됐다. 권력과 싸워야 했던 부모 세대(386 세대)와 달리, 그들이 싸워야 할 대상은 거대자본이다. 권력은 억압하나 자본은 유혹한다. 유혹의 달콤함에 스스로를 굴복시켰던 그들에게 자본은, 부정하자니 얻고 싶고 얻으려니 내겐 주어지지 않는 대상이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니 제 몸에 걸치는 청바지의 밑단을 짜증내듯 뜯고 잘라낸다. 적은 기대와 많은 짜증이 범벅돼 찢청 밑단에 신경질적으로 흐른다. 그러니까 찢청과 밑단은 작지만 확실한 반항의 시작이다. 부모가 시키는 대로 살던 그들이 부모의 뜻을 거역하기로 결심한 징후로, 더는 당신들 마음에 들 생각이 없다는 20대들의 선언이다. 지난 총선에서 20대의 투표율 상승은 우연이 아니다.
예술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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