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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7.06 20:43 수정 : 2016.07.06 20:58

[매거진 esc] 이동섭의 패션인문학

요즘 인기를 끌고 있는 래시가드. 네파 제공
옷은 신분의 상징이다. 프랑스 혁명군의 감시를 피해 루브르궁을 탈출하는 급박한 순간에도 마리 앙투아네트는 원피스와 장신구들을 한가득 챙겨야 했다. 궁궐을 벗어나면 왕비의 얼굴을 아는 이가 거의 없었으므로, 시선을 사로잡는 화려한 옷과 장신구들이 왕비의 가장 확실한 신분증이었다. 신분제 사회는 끝났지만, 여전히 옷은 신분을 알려주는 사회적 수단이다. 1990년대 골프복, 2010년대 등산복(아웃도어)은 한국 중년들에게 스스로를 중산층으로 믿고 안심할 수 있는 강력한 신분 표시였다.

요즘 20·30대 사이에서 뜨겁게 유행 중인 애슬레저룩은 어떨까? ‘애슬레틱’(Athletic)과 ‘레저’(Leisure)의 합성어인 애슬레저룩은, 활동성과 기능성을 가진 운동복이면서 평상복으로도 어색하지 않은 스타일을 뜻한다. 헬스클럽이나 요가센터에서 입고 운동하던 옷차림 그대로 카페나 학교도 갈 수 있다는 뜻이다. 어찌 보면 잠옷 입고 외출하는 것 같은 난감한 이 스타일은 갈아입기 귀찮다거나, 혹은 운동을 하면서도 스타일을 포기할 수 없는 패션피플의 요란한 취향의 문제가 아니다.

요가나 필라테스 할 때 입던 레깅스에서 발전한 애슬레저룩의 사회적 이미지는 체육복과는 완전히 다르다. 체육복은 몸을 편리하게 감추는 반면, 애슬레저룩은 몸을 확실하게 드러내는 것이 결정적 차이다. 체육복을 평상복으로 입는 사람에게는 대체로 불성실, 무능, 게으름, 불량스러운 이미지가 덧붙으나, 애슬레저룩은 밝고 긍정적인 이미지를 전파한다.

옷이 사회적 신분증이라는 측면에서 보자면, 헬스클럽 밖의 애슬레저룩은 착용자가 평소에 운동할 시간이 있는 여유로운 신분임을 드러낸다. 경제적 빈곤층은 먹고살기 위해 운동을 할 여분의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애슬레저룩은 자기관리도 철저히 하고 미래를 적극적으로 대비하는 사람의 이미지를 전달한다. 몸은 타고나지만 철저한 관리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꾸준한 운동으로 만든 나의 매끄럽고 탄탄한 몸은 애슬레저룩과 만나, 마침내 헬스클럽의 거울 속 나를 길거리에서도 자랑스럽게 보여줄 수 있게 된다.

래시가드의 유행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래시가드는 원래 바다에서 서핑을 하는 서퍼나 다이버 전용 의복이다. 강렬한 태양으로 인한 화상이나 발진 등을 막기 위해 만들어졌으나, 요즘은 간편한 일상복으로도 많이 입고 있다. 노출이 과하지 않지만 몸이 지닌 매력을 최대로 드러낼 수 있기에 각광받는다. 애슬레저룩과 래시가드의 유행을 통해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최고 스펙은 훌륭한 몸이며, 몸짱이 최고의 사회적 신분임을 알 수 있다.

타락이 아니다. 한국 청춘들이 정확하게 현실을 파악한 결과다. 개천에서 용이 날 수 없는 지금, 스스로 성공할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길은 연예인(10대의 장래희망 1위)과 스포츠 스타(김연아와 박지성)다. 두 직업 모두 몸을 가장 중요한 밑천으로 삼는 것은 우연이 아니다. 인스타그램에서 몸매(얼굴) 자랑으로 스타가 되듯 에스엔에스(SNS) 시대에 아름다운 몸은 결정적 자산이다. 인류 문명의 초기처럼 매력적인 몸이, 아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지금은 디지털 원시시대라 할 수 있다. 운동과 다이어트는 건강관리보다, 더 아름다운 몸을 갖기 위한 미용을 목적으로 거대 산업을 형성했다. 다이어트는 최고의 성형이다.

반전이 있다. 애슬레저룩과 래시가드는 항상 자기관리를 해야(만) 하는 사람들의 옷이다. 조금만 더 자기보다 관리에 철저하고 몸이 아름다운 누군가가 등장하면, 곧바로 낙오될 위험에 처한 약자의 표시이기도 하다. 숨만 쉬어도 정해진 날짜에 돈이 척척 들어오는 건물주 같은 사회적 강자들은 운동복과 평상복을 확실히 구분해서 입을 것이다.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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