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지역 유림단체 회원들이 지난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드배치 반대를 주장하며 상소문을 읽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매거진 esc] 이동섭의 패션인문학
성주지역 유림단체 회원들이 지난 27일 오전 서울 종로구 청운동주민센터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사드배치 반대를 주장하며 상소문을 읽고 있다. 김성광 기자 flysg2@hani.co.kr
옷은 사회적 메시지를 전달한다. 현대 사회에서 옷을 잘 입으려면, 옷이 대단한 사회적 기능을 수행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래서 대중 앞에 서는 정치인과 유명인에게 옷은 개성이 없을수록, 옷 선택은 비정치적일수록 안전하다. 패션피플로 자리매김한 몇몇 연예인을 제외하면, 유재석의 평범한 까만 뿔테 안경과 손석희의 소박한 전자시계가 모범답안이다.
정치적인 메시지가 드러나게 옷을 입으면 본의 아니게 뉴스의 중심에 설 가능성이 크다. 옷 하나도 마음대로 못 입냐고 하소연할 수 있지만, 사실 옷은 아주 정치적인 수단이다. 요즘은 백 마디의 말보다 사진 한 장의 힘이 더 크기 때문이다. 최근에 한국 사회의 자화상으로 삼을 만한 세 벌의 옷이 있다. 모두 정치적인 퍼포먼스였는데, 대부분 성공하지 못한(할) 듯 보인다.
김자연씨는 “우리에겐 왕자가 필요 없어”(Girls do not need a prince)라는 문구가 적힌 흰 티셔츠를 입은 사진을 트위터에 올렸다. 그러자 게임회사와 웹툰계, 정의당과 각종 커뮤니티 등이 얽히고설키면서 난리가 제대로 났다. 김자연? 7월18일 이전에는 아는 사람만 아는 게임업계의 여성 성우였으니 유명인은 아니었다. 본인도 놀랄 만큼 사건이 커진 이유는 그녀가 입은 티셔츠가 ‘메갈리아’ 후원 목적으로 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태를 여성학자 정희진은 “티셔츠 한 장으로 맺은 ‘남성연대’”라고 제목 붙였는데, 정말이지 김자연의 티셔츠는 윤복희의 미니스커트만큼이나 사회적으로 뜨거운 논쟁을 불렀다. 차별과 불평등, 혐오와 비아냥, 억압과 불안, 분노와 무시, 냉소와 조롱 등 2016년 한국의 숨기고 싶은 모습들이 티셔츠 한 장으로 터져나왔다.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에 포화가 집중되다 보니, 티셔츠의 문구에 대한 논의를 할 겨를이 없는 점은 못내 아쉽다.
지난 4·13 총선 당일 박근혜 대통령이 빨간 재킷을 입고 투표소에 나타나자, 야당에서는 난리가 났다. 대통령 재킷의 빨간색은 카메라 플래시를 받아 몹시 선명하게 빛났는데, 그게 새누리당의 로고 색깔과 같았다. 우연인지 의도인지, 패션 취향인지 총선 개입인지를 두고 정치권에서 말이 많았다. 청와대가 나서서 이걸 해명하기는 그렇고 가만있기도 애매했다. 새누리당에선 야당의 과민반응이라고 웃으며 말했는데, 선거 결과가 예상외로 나오면서 순식간에 잊혔다. 어쨌든 패션을 외교적 수단으로 활용하셨으니, 국내 언론 앞에서도 ‘옷조심’ 하시길.
이와 반대로 대중의 시선과 상관없는 보통 사람들이 정치적인 목소리를 내기 위해 선택하는 옷도 있다. 특별한 관광거리 없는 경북 성주군은 참외의 고장이자 독립운동가 심산 김창숙의 고향이다. 이런 농촌 소읍에 정부가 아무런 논의나 설명 없이 사드를 배치하기로 결정하자, 말도 못할 난리가 났다. 군수는 혈서를 쓰고, 군민들은 총리에게 물과 달걀을 던졌고, 성주 유림단체 회원들은 ‘사드배치 결사반대’ 머리띠를 갓에 두르고 도포 자락을 휘날리며 서울로 상경했다. 대통령이 왕도 아니고, 지금이 조선시대도 아닌데, 청와대를 향해 네 번 절하고 상소문을 읽는 장면은 몹시 진지하여 오히려 처연했다. 유림의 한복은 성주군민의 절박함을 토로하는 동시에 2016년 한국 정부의 의사결정 과정이 민주공화국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전근대적임을 일러준다.
대통령의 옷차림에 대해 “봄 같은 좋은 날씨에 붉은색 재킷이 얼마나 잘 어울립니까?”라던 권성동 새누리당 당시 선거대책위원회 전략본부장이 이 모습을 보고, “여름 같은 무더운 날씨에 흰색 한복이 얼마나 잘 어울립니까?”라고 성주 유림들 앞에서 말한다면, 정말이지 난리가 제대로 날 것 같다.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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