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8.31 19:09
수정 : 2016.09.01 11:48
[매거진 esc] 이동섭의 패션인문학
여름은 스포츠의 계절이다. 올해처럼 지독하게 더우면, 직관(직접 관람)보다는 텔레비전 중계 시청이 제맛이다. 늦은 밤 프리미어리그와 메이저리그 중계방송을 돌려 보다가, 한 가지 특이한 점을 발견했다. 외국 선수들은 문신을 가리지 않는다. 한국 프로야구 선수들이 문신을 옷과 팔 보호대 등으로 어색하게 가리는 것과 확연하게 대조되었다.
한국에서 문신은 불량배의 전유물이었다. 문신했다고 삼청교육대에 끌려갔고, 경찰에 검거된 조직폭력배의 몸에는 어김없이 용과 호랑이, 잉어 등이 현란하게 그려져 있었다. 첫 징병검사 전부터 전신에 문신이 있는 경우에는 4급 판정(보충역)을 받는다. 여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시선은 더 가혹했다. 문신한 여자는 ‘음란한 마녀’로 각인됐다. 즉, 문신은 일반인이 해서는 안 되는 금기이자, 사회에 해악을 끼치는 질 나쁜 사람들의 표시였다. 남자는 혐오와 불쾌의 대상으로, 여자는 방종으로 사회 밖으로 내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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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에 문신을 한 모습. 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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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서 다름(different)은 틀림(wrong)이다. 남들과 다르고 싶은 욕망을 억제하지 않으면 사회적으로 틀린 사람 대접을 피할 수 없다. 다름은 틀림이니, 틀림의 낙인에서 차별은 시작된다. 모든 차별은 처벌을 지향한다. 그래서 건실한 중산층이라도 문신을 새기면, 사회적 도덕률에 저항하는 셈이니 처벌을 감수해야 한다. 문신의 내용은 전혀 문제가 아니다. 내 몸인데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다. 권위적인 국가일수록, 국가 권력과 이데올로기가 개인의 몸까지 아주 강력하게 작동된다.
하지만 금지는 욕망을 낳는 법. 금지가 강할수록 인간의 열망은 강해지기 마련이니, 적절한 계기만 주어지면 금지는 강력한 선망으로 돌변한다. 2000년대 초반 문신이 타투로 개명되면서, 음지에서 양지로 옮겨왔다. 시작은 연예인과 운동선수, 유명 모델 등 대중 스타들이었다. 용과 호랑이가 사라지고 세련된 글씨와 별, 꽃과 동물 같은 단순하고 귀여운 디자인이 몸값 비싼 이들의 몸에 새겨졌다. 편견의 상징에서 패션 아이템으로, 음란은 섹시로 거듭났다. 영화에서 담배를 피우던 섹시한 여자는 허벅지 안쪽이나 뒷목 언저리, 가슴 옆 라인을 따라 타투를 새겼다. 차별의 표시는 아름답고 유혹적인 장식으로 대중들을 끌어들였다.
문신이 몸을 가만히 안 둬서 문제가 됐다면, 털은 가만히 두면 문제가 된다. 우리는 원래 털을 소중히 여기는 ‘친털민족’이었다. 근대화가 오로지 서구화로 점철되면서 친털파는 야수, 짐승, 불결의 동의어로 굳어졌고, 반털파가 득세했다. 털은 곧 구시대적, 반사회적인 코드가 됐다. 요즘 한국 남자들 가운데 턱(코)수염을 기른 이들이 드문 이유다. 그것은 예전의 문신과 비슷한 취급을 받는다. 특히 여자에게 털은 박멸의 대상이다. 제모와 왁싱은 여성스러움을 지키는 절대적 수단이다. 털은 여성스런 이미지에 치명적인 상처를 입히기 때문이다. 겨드랑이와 다리 등 보일 수 있는 모든 부위의 털을 없애고 피부를 말끔하게 정돈한 매끄러운 육체가 선망의 대상이다. 요즘은 남자들도 제모와 왁싱으로 털을 없애는데, 우연이 아니다.
<피로사회>의 지은이 한병철은 현대 자본주의 사회가 매끄러움을 숭상한다고 지적한다. 그래서 털은 왁싱으로 없애고, 늘어진 주름은 보톡스로 펴서 매끄럽게 만들어야 한다. 아름다움의 기준이 자본주의 속성에 맞춰 변화되었다. 패션 유행은 사회 정신의 결과물이다.
1960년대 히피의 상징인 장발과 수염은 곧 나는 사회의 틀에 순응하는 시민이 아니라는 의식의 표출이자, 무기력한 중산층으로 살지 않겠다는 저항의 표시였다. 이런 히피 정신이 미국을 변화시켰다. 지금 한국 사회에도 ‘21세기 친털파’의 재림이 필요하다.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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