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4.19 20:02
수정 : 2017.04.20 14: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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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에 오른 시민이 미세먼지에 대비해 마스크를 쓰고 도심을 내려다 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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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이동섭의 패션인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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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남산에 오른 시민이 미세먼지에 대비해 마스크를 쓰고 도심을 내려다 보고 있다. 신소영 기자 viator@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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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은 왔지만 봄 같지 않다. 벚꽃과 진달래가 피어도 봄의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다. (초)미세먼지와 황사로 하늘은 뿌옇고 공기는 탁해 숨쉬기 힘든 탓이다. 독감이 유행하던 겨울보다 대기오염 수치가 높고 황사가 부는 요즘 마스크를 낀 사람들이 더 많다.
마스크가 이렇게 보편화된 결정적 계기는 2015년 늦봄의 메르스 사태였다. 무능한 정부의 안일한 대처로 국민들의 전염 공포는 극에 달했다. 버스나 지하철에서 누군가 재채기라도 하면 불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번져나갔다. 불안은 빛보다 빨리 전파되어 많은 사람을 감염시킨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마스크를 썼고, 손세정제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사용했다. 국가의 잘못으로 생긴 마음의 불안을 스스로 줄여야 했고, 이로 인해 마스크는 불안한 사회를 살아가는 현대인의 생활필수품이 되었다.
마스크는 뭔가를 막는다. 바이러스 감염을 막고, 이미 바이러스에 감염된 사람이 타인에게 바이러스를 전염시키는 것을 막는다. 감염 예방과 전염 방지로 착용한 마스크는 고스란히 타인에게 전염의 공포와 두려움을 자극한다. 하얀 마스크를 보면 ‘나도 껴야 하나?’라는 불안과 초조에 휩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마스크를 낀 타자에 대해 우리는 위험을 환기시켜줘서 고맙다기보다는 불안을 촉진시킨 자극제라고 부정적으로 인식한다. 메르스 사태와 미세먼지 농도가 심한 날, 간혹 ‘뭘 유난스럽게 마스크까지 끼고 다니냐. 그럴 거면 집에 있으라’고 소리치는 이들의 심리가 이와 같다.
마스크는 가린다. 간혹 범죄자가 잘못을 뉘우치고 부끄러워 마스크로 얼굴을 가리기도 하지만, 주로 얼굴이 만천하에 알려진 최순실과 김기춘 같은 범죄(추정)자들이 언론에 노출될 때 마스크를 착용한다. 마스크로 입과 코 주위를 가린다고 가려질 얼굴이 아닐 테니 심리적 방어일 뿐이다. 선글라스를 끼고 법정에 출두하는 것과 같다. 나는 보겠지만 너희들에게 보여주지는 않겠다는 의지의 발현이다. 마스크는 가면으로서 얼굴의 일부를 가리는 동시에 감추고 싶은 그들의 마음을 폭로한다. 그로 인해 떳떳하게 제 얼굴도 드러내지 못해 마치 얼굴을 가린 도둑이나 강도처럼 음흉한 인상을 준다. 재벌 회장들이 검찰이나 법정에 출두할 때 구사하는 애장품인 휠체어도 비슷하다. 신체의 나약함보다 그것을 핑계로 법을 피해 가려는 꼼수로 읽힌다. 하지만 침묵 시위의 하얀 마스크는 비폭력 평화주의자들의 저항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아주 효과적인 수단이다.
마스크는 반짝인다. 청춘들의 마스크는 보건 기능을 넘어서 패션 소품으로도 활용된다. 연예인들의 공항 패션 아이템으로 등장하더니, 귀걸이나 목걸이처럼 완전한 패션 소품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의료품의 느낌이 없는 검정색이나, 꽃과 별, 호피나 점 같은 패턴이나 글자 등이 새겨져 있거나 빨강 등 파격적인 색을 선택한다. 혹은 마스크를 턱 라인으로 내려 껴서 얼굴을 작게 보이는 효과도 연출한다. 어차피 껴야 할 마스크, 가급적이면 예쁜 걸로 선택하겠다는 심리다. 이렇게 마스크가 일상화되니, 얼굴의 마스크는 마음의 마스크로 거듭난다. 마스크를 끼면 숨쉬기는 좀 불편해도 얼굴의 전부를 보여주지 않아도 되기 때문에 낯선 사람들을 대할 때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외출시 반드시 마스크를 착용하는 일본인들이 있다고 한다.
마스크는 현실을 폭로한다. 공기의 질이 급격히 악화되면서 공기는 물처럼 빈부격차의 지표가 되어 가는 중이다. 이대로 몇 년만 더 지나면, 부자들은 집에 비싼 공기청정기를 갖추고 편의점에서 깨끗한 공기를 사서 마시고, 빈자들은 오염된 공기로 생명의 단축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대기오염은 환경의 문제가 아니다. 생명과 복지의 문제다. 그래서 마스크는 안전에 관하여 가장 기본적인 것들마저 민간이 스스로 감당해야 하는 현시대의 침울한 자화상으로도 읽힌다.
이동섭 예술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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