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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6.23 10:35 수정 : 2016.07.06 10:13

데렉의 술, 그리고 사람

원수에게 쫓기다 절벽에서 떨어져 죽을 고비를 넘기고, 산속을 헤매다가 우연히 고대의 은거기인이 남긴 비급을 발견해 절차탁마한 끝에 고수가 되어, 화려하게 강호에 출두해 원수들을 도륙하고 미인을 얻어 강호를 은퇴하는 이야기. 남자라면 누구나 한번은 읽어보지 않았을까? 무협소설에 관한 이야기다.

처음 무협소설을 읽은 게 아마 중학생 때였지 싶다. 참고서를 사러 서점에 갔다가 범상치 않게 예쁜 여인이 표지에 나와 있던 책을 우연히 집어 들게 되었다. 호기심에 무슨 내용일까 하고 처음 몇 페이지를 읽다가 정신없이 빠져서 용돈을 탈탈 털어 책을 사갖고 집으로 왔다. 책 제목이 <영웅문 2부>(원제 <신조협려>, 저자 김용)였는데 집에 돌아와 1권을 한시간 만에 다 읽고 나니 웬걸, 다음 내용이 궁금해 죽겠는데 용돈은 이미 하나도 안 남은 상태.

머리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죄송스럽지만 어머니를 ‘꼬셨’다. 한번 읽어보시라고 건네드린 책을 어머니가 다 읽으신 후, 나는 내 용돈을 축내지 않고 다음 권을 당당하게 살 수 있었다. 하하.

무협지 대부분의 주인공에 딱 어울리는, 괄목상대라는 말이 있다. <삼국지>에서 노숙이 여몽을 만나서 그의 학식이 예전과 다르게 크게 발전한 것에 놀라자, 여몽이 “선비가 사흘을 못 만나고 나서 다시 만나게 되면 눈을 비비고 마주해야 한다”(士別三日 卽當刮目相待)고 대답한 것에서 유래한 말이다.

나는 ‘아란’(Arran) 싱글 몰트 위스키(한 증류소에서 보리를 발효, 증류한 뒤 숙성시킨 위스키)를 마실 때마다 이 괄목상대란 말이 떠오른다.

무협지 <영웅문 2부>와 아란 12년 캐스크 스트렝스. 데렉 제공
몇년 전이었던 것 같은데, 아란 증류소에서 처음 생산된 위스키 몇 종을 시음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위스키가 내 취향에는 참 안 맞았다. 위스키로서의 맛과 향을 이루는 여러 요소가 조화를 이루지 못하고 서로 심각하게 싸우는 느낌이랄까? 그때 구했던 아란 포트캐스크 피니시(위스키 숙성의 마지막 단계에, 포르투갈의 강화와인인 포트와인을 숙성시켰던 나무통에 넣어 향을 입힌 위스키)가 아직도 술장에 남아 있다.

그 뒤로 아란의 새 제품들이 여럿 발매되었다는 말을 듣긴 했지만 첫인상이 너무 안 좋아선지 굳이 찾아 맛을 볼 생각을 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연히 술자리에서 아란 12년 캐스크 스트렝스(나무통에서 숙성한 후 물을 타지 않고 그대로 병입한 위스키. 도수는 대략 54~63도)를 접했다. 술을 골라 마시기 어려운 술자리라서 하는 수 없이 한잔 받아 건배를 하고 맛을 봤는데 웬걸, 예전의 그 아란이 아니었다. 중구난방이었던 맛도, 향도 꽤나 정갈하게 정리되어 있었다. 마치 설익은 티만 풀풀 내던 사춘기 소년이 어느새 이런저런 경험을 겪고 나름 원숙해진 느낌이랄까. 그야말로 괄목상대였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다. 아란 증류소는 1994년에 시바스 브러더스(Chivas Brothers, 시바스 리갈 위스키를 생산하는 회사)에서 이사로 일하던 해럴드 커리가 1994년 스코틀랜드 아란(애런) 섬에 새로 세운 위스키 증류소이다. 실제 증류는 1995년에 처음 시작되었으니 싱글 몰트를 생산하는 증류소 중에서도 가장 나이가 어린 축이다. 역사가 오래된 곳과 달리 이런 곳은 자칫 제약으로 작용할 수도 있는 전통이 없으니 새로운 시도를 하기 편하고 따라서 발전 가능성도 크다. 20대의 발전 가능성이 가장 큰 것과 마찬가지다.

선입견으로 사람의 진면목을, 술의 진면목을 알지 못하고 지나치는 경우가 분명히 있었을 것이다. 무협소설 속 ‘괄목상대’했던 주인공이 객점에서 죽엽청을 마시듯이, 그동안 연락하지 못했던 사람과 바에서 위스키를 한잔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핸드폰 속 전화번호부를 찾아봐야겠다.

아저씨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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