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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19 19:26 수정 : 2016.10.20 10:13

[ESC] 데렉의 술, 그리고 사람

데렉 제공
휴일엔 가끔 아파트 베란다 앞 조그마한 공간에 캠핑용 의자를 펼쳐놓고 앉아, 오래된 빈 화분에 발을 올려놓고 커피를 마시곤 한다. 웹서핑을 하거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을 끼적여대다가 멍하니 ‘멍때리기’도 하고 음악을 듣기도 한다. 보통은 빅밴드 스윙이나 트로트를 많이 듣는 편인데 오늘은 간만에 나온 메탈리카 형님들의 신곡을 들으며 ‘에헤라디야~’라며 흥얼거리고 있다.

집에 오디오를 그런대로 갖추고 있긴 하지만 정작 제일 자주 사용하는 오디오는 안타깝게도 헤드폰이다.(아파트니까요!) 전문가용 헤드폰이라 따로 헤드폰 전용 앰프를 사용해야 더 나은 음질을 즐길 수 있다. 하지만 아이패드에 연결해도 뭐, 나름 좋다. 이 정도면. 아니 아주.

그렇게 초가을의 아직은 따뜻한 햇살을 받으며 머릿속을 비우고 두 개의 진동판을 통해 가짜 공간감을 느낀다. 좌우 양쪽의 소리를 통해 인간이 3차원 공간감을 느끼는 것처럼 <매트릭스>라는 영화에 나온 가상세계가 실은 진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뜬금없이 해본다. 다들 그런 생각 한번씩은 하지 않았을까? ‘나는 알약을 선택할 기회도 없이 기계 안에서 어느 존재에게 에너지를 공급하며 사는 것은 아닐까. 그렇게 살다가 내 에너지가 다하면 폐기처분되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 말이다.

하긴 나라는 존재가, 내가 느끼고 남이 느끼는 그 모든 것의 집합체라고 본다면, ‘진짜' 내가 무엇인지가 무슨 상관일까 싶기도 하다. 만약 내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실은 컴퓨터 소프트웨어라면, 지금 마시는 이 커피가 프로그래밍 언어의 코딩된 한 줄이라면? 그렇다고 큰 문제는 아닐 것 같다. 내가 느끼는 내가 유기물이건, 실은 어느 전자회로상 ‘0101’의 집합체건 그게 무슨 상관일까. 데카르트의 말대로 ‘내가 뭘까’를 고민하고 있는 나는, 분명히 어떤 식으로든 존재하니까. 그렇게 즐길 수 있으면 그만인 게다.

이렇게 맥락 없이 떠오르는 생각들은 시간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아, 이건 글로 쓰면 좋겠다 싶어 급하게 종이를 찾아 적으려 하면, 이미 그 생각을 처음 했던 때의 느낌과는 달라져버린다. 마치 ‘아! 이거 정말 괜찮은 생각인데?’ 싶다가도, 물을 마시러 냉장고 앞으로 걸어가 문을 열고 물을 마신 뒤 문을 닫고 나면 별것 아닌 게 돼버리는 상황과 비슷하다. 조금 과장해 말하자면 정신없이 어느 이성에게 나 혼자 빠졌다가 어느 순간 갑자기 ‘내가 그 사람에게 왜 매력을 느꼈었지?'라며 퍼뜩 정신이 드는 느낌이랄까. 정작 그 대상(사람이건 물건이건)은 나라는 존재를 알지도 못하거나 알아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게 확실할 텐데.

냉장고 한쪽에 40년 숙성 포트와인(와인에 브랜디를 첨가해 주정을 강화한 와인)이 한 병 있다. 열어서 마신 뒤 냉장보관한답시고 넣어두고 있지만 아마도 약간은 맛이 변했을 오래된 와인이다. 생각해보면 세상 모든 일에는 때가 있다. 공부하기 좋은 때, 연애하기 좋은 때, 결혼하기 좋은 때, 취직하기 좋은 때 등 말이다. 그래도 딱히 그런 ‘때’를 지키지 않아도 상관은 없다. 아주 약간의 정성만 더 들이면 될 일이다. 나로서는 그저 ‘맛있는 음식과 술을 먹고 마시기 적합한 때’는 아직 지나지 않아 다행이지 싶다.

글로 적은 내 모습을 처음부터 다시 읽어보니 무슨 멋진 사람이 한껏 폼을 잡고 포트와인을 한잔 따라 마시고 있는 모습을 묘사한 것 같아 스스로 어이가 없어진다.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추리닝(트레이닝복이라고 쓰면 맛이 살지 않는다)을 입은 중년의 아저씨가 낮술에 얼굴 벌게진 모습일 뿐이다. 말이 그렇지 진짜 얼굴이 벌게지면 창피하니 낮엔 한잔보다 더는 안 마시려고 한다. 어쨌든 밖에선 내가 앉아 있는 모습이 안 보여서 정말 다행이다.

이런 의미 없는 생각에 생각을 하다 보니, 오늘 저녁엔 또 어떤 술을 수단으로 삼아 아무 가치도 쓸모도 없는 상상을 조금이라도 더 해볼까 궁리해보고 싶어진다. 생각만 해도 즐겁다. 이렇게 또 하루 술꾼의 휴일은 간다. 건배.

데렉 아저씨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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