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2.14 19:16
수정 : 2016.12.14 1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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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산 와인 ‘베가 올리베라스’. 데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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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데렉의 술, 그리고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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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산 와인 ‘베가 올리베라스’. 데렉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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막연한 동경을 갖고 있지만 막상 해보자니 뭔가 어설플 것 같고, 용기를 내어 조심스럽게 발을 들이밀었다가 살짝 실패를 하고 나니 더 시도해 볼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것들이 누구에게나 있다. 나에게는 와인이 그렇다.
위스키도 보편적인 블렌디드나 싱글몰트는 물론, 직접 생산하지 않고 증류소에서 사들여 자기 상표를 달고 출시하는 독립병입업자의 위스키까지 더하면 정말 다양한 맛을 즐길 수 있다. 그래도 와인에 비할 바는 아니다. 다른 어떤 술보다도 긴 역사를 바탕으로 위스키보다 훨씬 많은 국가에서 더 많은 양조장이 매년 다른 와인을 생산하고 있다. 이런 다양성을 한번이라도 느껴 본 술꾼이라면 와인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역으로 이런 다양성이 입문자에게는 장벽으로 다가온다. 증류주와 달라서 와인은 일단 마개를 따면 어지간하면 그날 다 마셔야 하는데 나름 비싼 가격을 주고 산 술이 별로면 난감함이 ‘텍사스 소떼처럼’ 밀려온다. 현지, 특히 이탈리아나 스페인 같은 남부 유럽 국가에서야 우리나라에서 생맥주 피처를 시켜 마시듯이 500㎖, 1ℓ 단위로 와인을 덜어서 팔지만 우리나라는 사정이 다르다. 그렇게 팔지도 않고, 뭣보다 그 동네처럼 싸지도 않으니 모험하기가 겁이 난다. 동네 아저씨들이 걸걸한 목소리로 떠들며 그야말로 벌컥벌컥 들이켜는 와인들은 부담 없이 시원시원하게 마시기 딱 좋지만 마진이나 기타 여러 문제로 수입이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그보다 가격이 비싼 와인들은 개성이 생기면서 역으로 취향을 탄다. 뭣보다 빈티지(포도의 생산연도)에 따라 브리딩(와인의 마개를 미리 열어놓는 것)이나 디캔팅(와인을 다른 용기에 옮겨 담아 공기와 접촉시키고 침전물을 제거하는 것)을 알맞게 해줘야 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신경을 써줘야 맛이 좋아지는 와인이 많다. 초보자가 마시기엔 애로가 꽃핀다.
그렇게 짝사랑만 하다가 친구의 권유로 마신 와인이 눈을 번쩍 뜨게 했다. 언젠가 여행 갔던 토스카나 시골에서 턱수염이 많이 난 시골 아저씨가 꼭 동네 호프집에서 쓸 것 같은 유리 피처잔에 콸콸 따라서 준 바로 그 와인을 다시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스페인에서 생산된 ‘베가 올리베라스’(Vega Oliveras)라는 와인이다.
첫 한 모금을 입에 머금는 순간 산미가 확 느껴진다. 바로 삼키고 싶은 욕망을 주체할 수 없다. 목으로 넘기고 나면 부드러운 깊이감과 단맛이 스윽 하고 따라온다. 스파이시한 향도 느껴진다. 뭣보다 이 모든 맛의 요소들이 기가 막히게 균형을 이루고 있다. 과도한 보디감이 없어 더 좋다. 친구들과의 즐거운 술자리에서 좀 큰 잔에 콸콸 따르고 벌컥벌컥 마시면 만족감이 배가될 그런 와인이다. 코르크를 열자마자 마셔도 좋지만 20분여 열어놓고 난 뒤 마시면 농밀한 느낌까지 느껴진다. 경험이 모자라 그렇겠지만 3만원 이하의 가격대에서 이것보다 맛있는 와인을 만나본 기억이 없다. 가격이 얼마냐고? 5000원.
보디감이라든가 산미라든가 하는 와인에 대한 이런저런 어설픈 수식어를 잊게 만들 정도로 우아하고 응축된 맛을 내주는 최고의 와인도 물론 있었다. ‘카사노바 디 네리’(Casanova di Neri)라는 와이너리에서 만든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 체레탈토’(Brunello di Montalcino Cerretalto)라는 와인이 나에겐 그랬다. 현지에서 150유로라는 큰돈을 주고 산 와인이었지만 마시고 나서 돈이 아깝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와인을 매일 마실 순 없다. 항상 외출할 때마다 멋진 옷을 제대로 차려입을 순 없지 않은가. 와인도 마찬가지다. 돈을 들이고 열심히 준비해서 극상의 맛을 즐기게 해주는 와인이 있는가 하면 이렇게 아무 때나 신경 좀 덜 쓰고 마셔도 큰 만족감을 주는 와인도 있는 법. 어느 쪽이 더 고마운 존재인지는 말할 필요도 없겠다.
일반적으로 가성비가 좋다고 알려진 칠레 와인이나 와인의 본고장이라고 할 만한 프랑스 와인도 이리저리 접해 봤지만 큰 매력을 느껴본 적이 없다. 아직 와인을 잘 모르기 때문에 그런 걸 거라 생각하는데, 뭐 그럼 어떤가. 이렇게 한 지역의 와인에 매력을 느끼고 접하다 보면 곧 다른 지역 와인의 매력에도 빠질 수 있을 것이다.
집에 마지막 남은 베가 올리베라스를 오늘 열었다. 조만간 마트에 가서 또 대여섯병 사와야겠다 싶다. 이렇게 부담 없이 즐길 수 있는 와인들이 더 많이 수입되었으면 좋겠다.
데렉 아저씨 애주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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