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09.07 05:01 수정 : 2016.09.07 10:10

정치BAR_보좌관 Z의 여의도 일기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공복이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머슴이 되고픈 의원의 손과 발과 머리가 되는 사람들이 보좌관입니다. 정치부터 정책까지 의원과 가장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치 현장 최일선에서 뛰고 있는 익명의 여러 보좌관들이 보고 듣고 느낀 ‘정치의 속살’을 전합니다.


어떤 보좌관들은 의원들의 자서전을 대필하는 일도 한다.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젊은 작가가 한국전쟁 때 중공군으로 참전했던 노인에 빙의돼 독백체로 들려주는 전쟁 이야기가 담긴 소설집을 읽은 적이 있다. 그 소설집에는 19세기 미국인으로 빙의돼 자신의 이야기를 편지 형식으로 전하는 단편도 있었다. 김연수 작가의 소설집 <나는 유령작가입니다>에 나오는 소설들이다. 어찌 보면 모든 소설가는 작품 속 인물에 빙의해 이야기를 대신 전하는 ‘유령작가’다.

고교 시절 친구들의 고까운 눈길을 알면서도 여자들의 관심을 사기 위해 소설집을 들고 다니거나 유명 문학 계간지를 탐독했던 나는 작가를 꿈꿨던 청년이었다. 먹고사느라 바빠 꿈을 잊은 지 10년도 넘어서 국회에 들어와 드디어 꿈을 이루게 됐다. 나는 ‘유령작가’, 대필작가가 됐다. 그러나 이야기 속 내가 빙의할 인물은 오직 국회의원뿐이었다. 비극이었다.


‘작가의 꿈’ 이뤘지만 작품은 국회의원 자서전

나는 오랫동안 여러 국회의원과 일하며 몇 권의 책을 쓰신 선배 ‘문인’에게는 한참 못 미치는, 아직 두 권의 ‘작품’밖에 내지 못한 신인급 대필작가다. 신인이다 보니 유명 정치인이 아닌 초선, 재선 의원의 책 두 권을 썼다. 대부분의 의원실에서는 해당 의원실 보좌관이나 공보 담당 비서관이 의원의 ‘유령작가’가 된다. 평소 의원의 삶이나 의정 활동, 지역구 활동을 가장 잘 알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대필작가 비용을 들이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원실에서 마땅한 ‘유령작가’를 찾을 수 없을 때는 나처럼 다른 의원실의 보좌관인 외부 ‘유령작가’가 동원된다.

나의 첫 ‘작품’은 지금은 낙선한 신세인 어느 초선 비례대표 의원의 책이었다. 성명서나 연설문만 쓰던 나는 온갖 산전수전을 다 겪은 금테 안경을 쓴 A의원의 대필작가로 등단할 기회를 얻었다. A의원의 요구사항은 간단했다. 자신의 인생 스토리를 책으로 엮어달라는 것이었다. 초보 대필작가이다 보니 원고료는 100만원. 그러나 나는 등단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A의원의 일정이 비는 주중 오후에 찾아가 3~4시간씩 두 달간 의원의 인생 스토리를 들었다. 그리고 이후 두 달간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노트북을 켜고 A의원에 빙의돼 원고를 썼다. 어린 시절 공부는 못했지만 의협심이 있어 대인관계가 원만했다는 A의원의 이야기나, 사회생활을 시작하면서 겪은 고생들, 그리고 이후의 ‘성공’ 과정을 글로 풀어놓자니 영락없이 ‘작품’이 아니라 ‘자기소개서’의 확장판이 될 수밖에 없었다. 첫 ‘작품’은 졸작이었다. 그러나 A의원은 나의 ‘작품’으로 성대하게 출판기념회를 열어 꽤 많은 정치자금을 모을 수 있었다.


인생 스토리 만들고 의정활동 자료 붙이면 뚝딱

국회의원들의 출판기념회가 요즘은 뜸하지만, 19대 국회까지만 해도 국회 의원회관에서는 시즌만 되면 하루가 멀다 하고 출판기념회가 열렸다. 지역주민들을 부르고, 해당 의원의 상임위원회 피감기관 관계자들이 와서 북적대는 출판기념회가 끝나면 억 단위의 정치자금이 남는다고 한다.

나의 두 번째 작품은 이런 목적에 충실한 작품이었다. 철저히 지역구 선거를 위한 책이었다. 재선의 관료 출신인 B의원은 애초부터 개인 스토리로 책을 내자고 할 사람이 아니었다. 좋은 대학을 졸업하고 행정고시 출신으로 수십년간 공무원 생활을 하다 국회의원이 된 사람에게 소설 같은 스토리가 있을 리 만무했다. A의원처럼 인터뷰할 필요도 없이 B의원의 언론 인터뷰 기사를 모아 스토리를 짜서 50쪽 안팎의 개인사를 쓰고, 나머지 대부분은 지역구에서 B의원이 이룬 업적과 공약들로 가득 채웠다. 이런 형식에 익숙지 않았던 나는 다른 의원들의 비슷한 형식의 책들을 참고했다. 국정감사 때 지역 이슈를 장관이나 기관장에게 제기했던 질의서를 그대로 옮겨놓은 챕터, 지역구 단체장이나 지역 기관장과의 인연을 늘어놓은 챕터, 유력 실세 정치인과의 친분을 과시하는 챕터는 그렇게 만들어졌다.


지역구 맛집, 관광지 정보 담긴 ‘대필작품’이 더 좋더라

작가들이 평론가 못지않게 다른 작가의 작품을 탐독하는 것처럼, 나도 동료 ‘유령작가’의 작품은 일부러 찾아보곤 한다. 그중 가장 유용한(?) 책은 여당 C의원의 책이었다. 지자체장 출신인 C의원의 책에는 해당 지역의 맛집 100여개가 표와 사진으로 정리돼 있다. 두번째로 유용한 책은 D의원의 ‘해외여행기’였다. 유럽의 정치를 둘러보고 와서 썼다는 이 책은 유럽의 정치인과 찍은 사진들과 관광지에 대한 정보로 가득 차 있다.

나는 차라리 이런 책들이 앞서 말한 A, B의원의 책보다 훨씬 가치가 있다고 본다. 정치인의 책을 사서 보는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적어도 C, D의원의 책은 그나마 맛집, 관광지 정보라도 있지 않은가. 그래서 ‘유령작가’인 나의 작품은 오늘도 그 의원의 탕비실에 박스째 틀어박혀 있다.

때때로 ‘문인’으로 변신하는 한 보좌관


◎ 정치BAR 페이스북 바로가기
◎ 정치BAR 텔레그램 바로가기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보좌관 Z의 여의도 일기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