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1.02 09:42
수정 : 2016.11.02 09:51
정치BAR_보좌관 Z의 여의도 일기
국회의원들은 “국민의 공복이 되겠다”고 다짐합니다. 머슴이 되고픈 의원의 손과 발과 머리가 되는 사람들이 보좌관입니다. 정치부터 정책까지 의원과 가장 가까이에서 호흡하며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사람들입니다. 정치 현장 최일선에서 뛰고 있는 익명의 여러 보좌관들이 보고 듣고 느낀 ‘정치의 속살’을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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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3월 노무현 대통령 탄핵소추안 처리를 앞두고 국회 의장석에서 여야 의원들간의 격렬한 몸싸움이 벌어지고 있다. 윤운식 기자 yws@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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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4·13 총선 때 낙천한 한 더불어민주당 인사가 얼마 전 라디오에 출연해 울먹였다. 이런 비상시국에 야당은 지금 뭘 하고 있느냐는 비판을 많이 받는다고 하면서, 말을 맺지 못했다. 19대 국회 때 ‘뜨거운 의정활동’을 했던 그로선 지금 야당을 지켜보면서 눈물이 날 만도 했을 것이다.
“야당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
온 나라가 시름에 젖어 있지만, 국회에서 하루 종일 시간을 보내야 하는 나는 답답함에 체증이 생길 정도다. 더불어민주당·국민의당 모두 연일 대통령과 최순실씨에 대한 분노와 규탄, 대응책을 내놓고 있다. 1일 민주당 지도부는 국회 의원회관 대회의실에서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 대한 국민보고대회를 한다며 보좌진도 참석하라고 문자를 보냈다. 지난 9월 야당이 김재수 장관 해임건의안을 의결한 뒤 정세균 국회의장이 중립을 어겼다며 격분했던 새누리당조차도 당원들까지 동원해 국회 의사당 본관 앞 계단에서 대규모 규탄대회를 했는데, 스스로 ‘비상시국’이라고 규정한 민주당은 당원과 국회의원, 시민까지 모두 참여시켜도 모자랄 판에 고작 500명도 앉지 못하는 회의실에서 보고대회를 하려다가 ‘볼품없다’는 지적에 본관 앞 계단으로 장소를 옮겼다. 어처구니가 없다. 이런 소극적이고 수동적인 태도와 메시지는 공허한 메아리라는 생각이 든다. 민주당 소속 보좌관으로서, ‘야당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느냐’는 비판이 너무도 아프다. 촛불을 들고 거리로 나선 시민들, 에스엔에스(SNS)에서 분노를 표출하는 누리꾼들은 “차라리 대통령이 물러나고 리더십을 새로 세우는 게 깔끔하지 않냐”며 하야·탄핵을 주장하고 있고, 야당도 이를 강력하게 밀어붙이기를 원하고 있다. 그러나 야당은 섣불리 나서길 꺼리고 있다. 2004년 한나라당이 주도한 노무현 대통령 탄핵 이후 국민들의 분노는 단번에 상황을 역전시켰고 곧 열린 총선에서 열린우리당은 몰표를 받았다. 이때 한나라당에 불었던 역풍 탓에 여의도에서 탄핵과 하야는 금칙어가 됐다.
민주당 의총에서 “탄핵·하야” 나왔지만…
10월의 마지막날 열린 민주당 의원총회에선 ‘어떻게 할 것인가’를 놓고 격론이 벌어졌다. 의총이 비공개로 열릴 땐 의원과 보좌관들만 회의장에 들어갈 수 있기 때문에 생생한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의원들은 흥분하고 있었다. 그동안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했던 탄핵, 하야란 말도 나왔다. 요즘 화두로 떠오른 거국중립내각을 놓고도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답답하긴 마찬가지였다. 그러다 마지막 발언자로 한 중진 의원이 뚜벅뚜벅 연단으로 나가 마이크를 잡았다. 그는 냉정한 현실 인식과 뜨거운 가슴을 요구했다. “오늘의 사태는 비상상황이다. 우리 당이 지금을 비상시국으로 선언하고, 의원들은 의원회관에서 대기하며 매일 오전에 의원총회를 열어 머리를 맞대야 한다. 청와대와 새누리당을 압박해 실체적 진실을 밝힐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머리를 한 대 맞은 기분이었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탄핵 정국 때 나도 국회에 있었다. 당시 노 대통령의 탄핵 사유는 지금 상황에 비춰보면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경미한 사안이었다. 노 대통령이 공개적으로 열린우리당을 지지했던 것과 박근혜 대통령이 자신의 눈과 귀와 뇌를 ‘비선’에 의지했다는 것은 차원이 다른 문제다. 그럼에도 12년 전, 한나라당은 탄핵안을 통과시켰다. 탄핵을 막으려 했던 열린우리당 소속 의원들과 보좌진들의 열의보다는 한나라당의 집요함이 더 컸다. 그렇기 때문에 새벽녘에 의장석을 기습적으로 점거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년 전 대통령을 제거하려던 한나라당의 간절함
최순실씨가 귀국해 검찰 조사를 받고 긴급체포됐다. 박 대통령은 수족을 잘라내고 정치 입문 18년 만에 ‘홀로서기 정치실험’에 직면했다. 그러나 세월호 참사가 일어나던 날 사라진 ‘대통령의 7시간’처럼 최순실씨 입국 뒤 검찰 소환 때까지 31시간 역시 미스터리로 남아 있다. 그동안 검찰이 뭉그적거리며 시간을 벌 동안 증거인멸과 말맞추기를 했을지 모를 일이다. 2014년 일어난 세월호 참사의 진상규명이 그동안 어떻게 뭉개졌는지를 돌이켜 보면 역대급 국정농단 사태의 실체를 밝히는 일 역시 쉽지 않아 보인다. 이제 장기전이 시작됐다.
음식 맛이 이상하다고 사장을 불러낼 수는 있어도 음식이 상하거나 불순물이 들어가 있지 않은 이상 사장에게 책임을 묻기는 어려운 것이 현실이지 않은가? 음식점 주인은 사실을 숨기려 하거나 ‘배째라’는 식으로 나올 것이다. 야당이 할 일은 명확하다. 주인도 인정할 수 있도록 음식에 문제가 있다는 증거를 명확하게 찾아야 한다. 같이 음식을 먹고 있는 손님들에게 사실을 말하고, 소문을 내고, 블로그에 글을 올려서 음식점 주인으로부터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아내고 책임을 지도록 해야 한다.
야당에 필요한 것은 집요함과 긴장감이다. 인터넷으로 기사를 보면서 청와대와 새누리당을 욕하기는 쉽다. 망가진 대통령을 희화화하거나 험한 말로 비하하기도 쉽다. 12년 전 한나라당이 무모하게 탄핵을 추진했던 것을 따라 하자는 것이 아니다. 노 대통령을 정치적으로 제거하려 했던 그 ‘간절함’을 떠올려보자는 말이다. 사건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도록 압박하고 예산과 법안, 정책을 재검토하는 일은 야당의 몫이다. 나는 이제 국회에서 밤을 새울 준비가 돼 있다.
국회에서 밤샘할 각오인 민주당 보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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