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허지웅의 설거지
100만개의 촛불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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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이자! 분노하자! #내려와라 박근혜 3차 범국민행동’ 문화제가 12일 서울 광화문광장에서 열려 시민들이 촛불을 들어 올리며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고 있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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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나라는 망하지 않았다
좌절하고 침묵하는 것 같은
시민 공동체의 힘이었다 어느 날 작업실에서 인터뷰를 하다가 현 정권의 문화정책과 관련한 질문을 받았다. “내가 어떤 말을 하면, 어떤 글을 쓰면, 어떤 영화를 만들면 불이익을 받겠지, 라는 생각이 들게 만드는 토양 위에서는 어떤 문화도 자라나지 않는다. 멀쩡하던 영화제가 망가지고 모든 영역에서 자기 검열이 판을 치고 정권에 반하는 말을 했다가 언제 어떻게 국정원에서 마티즈를 보낼지 모른다는 인식이 팽배한 상황에서 ‘문화를 정책적으로 융성하겠다’는 말은 또 다른 눈먼 돈잔치를 하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다. 그런 정책은 애당초 문화와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말했다. 인터뷰를 끝내고 혼자 앉아 있는데 아무래도 기분이 지저분했다. 일어섰다 앉았다 서성대다가 핸드폰을 집어 들고 내려놓기를 삼십 번 정도 반복한 것 같다. 나는 마침내 결심을 했다. 그리고 흡사 <그래비티>에서 지구에 도착한 샌드라 불럭이 대지를 밟고 일어서는 박력으로 문자메시지를 보냈다. 기자님. 네. 마티즈 이야기는 빼주세요. 나는 그날 밤 너무 창피해서 술을 진탕 마시고 기절해버렸다. 이러다가는 내가 망가지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저쪽에서 이유를 말해주지 않는다면 내가 이유를 찾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해당 방송사의 고위직과 친한 지인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그리고 이유가 뭔지 좀 알아봐달라는 부탁을 했다. 누구에게 부탁하는 걸 싫어해서 말을 꺼내기가 너무 힘들었다. 그런데 막상 답은 생각보다 빨리 돌아왔다. <국제시장>에 비판적인 의견을 냈다가 논란에 휩싸였던 일이 문제였다. 당시 그 방송사의 모기업 회장이 수감 중이었는데, 이런 상황에 정권에 밉보이면 안 되기 때문에 아무래도 일단은 출연금지가 된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일선 피디들은 그런 사실을 잘 모르니까 섭외가 자꾸 가는 거고, 최종 결제에서 엎어지는 것도 그것 때문이다, 좀 기다리면 해결될 거다, 라는 이야기가 덧붙여졌다. 짐작은 했지만 정말 그것 때문이라니 조금은 허무했다. 이전에도 개그맨 친구와 해당 계열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하기로 했다가 잘 안되었는데 그때 이 친구로부터 “형 여기 블랙리스트에 올라가 있다는데?”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그냥 웃어넘겼었다. 대체 <국제시장>은 나와 무슨 악연이길래 사람을 이렇게 괴롭히는지 알 수가 없었다. 아무튼 이유를 알고 나니 마음이 가벼워졌다. 내가 원했던 건 오직 명쾌한 인과관계뿐이었다. 나는 그날 밤 두 다리를 다 뻗고 오랜만에 아주 잘 잤다. 이게 다 1년 전 일이다. 그동안 많은 일이 있었다. 몇달 전 회장은 석방되었다. 정권에 레임덕 분위기가 감지되면서 내 출연금지도 어느 시점에서 풀린 모양이었다. 나는 지금 해당 계열 방송사의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있고 앞으로 몇 개 더 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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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와 촛불집회에 참석한 허지웅씨. 허지웅 페이스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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