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6.29 21:21
수정 : 2016.07.08 10:47
[매거진 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눈덮인 설악산 희운각에서 만난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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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덮인 산에 고립되면 없던 로맨스도 생길 수 있다. 눈에 파묻힌 설악산국립공원 중청대피소.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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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간해서는 혼자 여행을 가지 않던 내가 딱 한 번 동행 없이 설악산에 오른 적이 있다. 한겨울이었다. 변변한 산행 장비도 없었다. 등산화와 장갑 정도가 전부였다. 아침에 출발할 때 김밥 네 줄과 생수 한 통을 샀다. 왜 그때 혼자서 산을 찾았는지는 창피하니까 말하지 않겠다. 다만 이렇게나마 반복되는 일상을 벗어나면 뭔가를 결심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는 정도로 해두자. 일곱시 몇분에 동서울터미널을 출발하여 설악까지는 네 시간 거리였다. 소공원 입구에 도착해 바라본 하늘은 우중충했다. 일기예보도 점검하지 않았다는 걸 뒤늦게 깨닫고 매점에서 오천원짜리 아이젠을 샀다. 비선대를 거쳐 희운각을 지나 대청봉에서 일박하는 걸로 코스를 잡았다. 새벽에 정상에서 일출을 보고 백담사 쪽으로 내려올 작정이었다.
산에 오른 지 두 시간쯤 지났을까. 슬슬 배가 고팠다. 휴게소는 조금 전에 지나쳤다. 축축하지 않은 바위에 앉아 김밥을 꺼냈다. 해가 지기 전에 대청봉까지 가야 했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딱딱해진 김밥을 씹었다. 귀찮아서 장갑은 벗지 않았다. 오후 다섯시쯤 되자 조금씩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이정표를 보니 희운각 대피소까지는 2㎞ 거리였다. 부지런을 떨면 해 지기 전에 대청봉까지는 충분히 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오판이라는 것은 반 시간이 채 지나지 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대피소를 지나 얼마 가지 않았는데 눈이 엄청난 기세로 쏟아지기 시작했다. 사람은커녕 ‘다람쥐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잠시 하늘을 보며 상황을 가늠해 보았다. 이제 와서 되돌아가고 싶지는 않았다. 장고 끝에 했던 결심까지 와르르 무너질 것 같았다. 이렇게 되면 끝까지 오르는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두고 치기라고 하겠지. 이미 축축해질 대로 축축해진 바지를 추스르고 등산화 끈을 고쳐맸다. 하지만 과장이 아니라, 오르는 길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눈이 쌓였다. 걸을 때마다 벗겨지는 싸구려 아이젠을 고쳐매는 것도 이만저만 곤란한 일이 아니었다. 한기가 느껴졌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기서 죽으면 하드에 저장된 동영상들은 어떡하나. 그 걱정이 제일 먼저 들었다. “이 새끼 이거 순 저질이구먼.” 이런 메아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했다. 길 잃은 음탕한 양이 된 기분이었다.
그때 정상 쪽에서 뭔가가 내려왔다. 거센 눈발을 뚫고 성큼성큼 다가온다. 사람인가. 사람이다. 그냥 사람이 아니라 전문 산악인 같았다. 그는 나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젓더니 그 차림으로 계속 올라가면 죽는다고 했다. 자기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어 대청봉을 포기하고 희운각으로 간다면서. 나는 끽소리도 못하고 그를 따라 쫄래쫄래 대피소로 발길을 돌렸다. 도착했을 때는 정강이까지 눈이 쌓여 걷기가 힘들 지경이었다. 그곳에는 갑자기 퍼붓는 눈을 피해 하룻밤 머물다 가려는 사람이 여럿 있었다. 말 그대로 대피소였기 때문에 공간은 협소했다. 연인, 앳된 얼굴의 학생, 막 제대한 듯한 청년, 그리고 사연이 있어 보이는 아가씨. 나까지 모두 일곱 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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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악산국립공원 중청대피소. 김정효 기자 hyopd@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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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끌고 내려온 산악인은 붙임성이 좋아서, 잉글리시였다면 “Where are you from?” 정도가 될 질문을 여기저기 던지며 사람들과 금세 말문을 텄다. 그의 제안으로 우리는 각자가 가져온 음식을 한자리에 꺼내놓고 빙 둘러앉아 늦은 저녁을 먹었다. 세상이 좁아진 듯 고립되어 있다는 상황이 낯모르는 이들에 대한 벽을 허문 것이리라. 김치찌개를 끓이고 불고기도 지글지글 구웠다. 팩소주가 열 병 남짓. 나는 먹다 남은 김밥을 꺼냈다. 우리는 제수알도 부팔리노(<그날 밤의 거짓말> 등을 쓴 이탈리아 소설가)의 소설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돌아가며 산을 찾은 사연을 이야기했다. “이이가 설악산으로 신혼여행을 오자고 했어요. 산에서 만났거든요. 대청봉에 올랐다가 일출 보고 공룡 쪽으로 가려고요.” “공룡? 내일이면 눈이 얼어서 위험할 텐데.” “괜찮아요. 작년에도 갔었고.”
‘결심’이 필요해 떠난 나홀로 등산
폭설 만나 계획없이 묵게 된 대피소
급체로 우웩대는 중에 다가온 손
따뜻했다, 놓지 않았다, 그리고…
앳된 얼굴의 학생은 자신한테 소홀한 애인 걱정도 시킬 겸 담력을 키우기 위해 왔다며 호연지기 가득한 표정으로 웃었다. 청년은 전역하고 시간이 지났는데도 취직을 하지 못하는 바람에 부모님 눈치가 보여서 왔다며 약간 애처롭게 말했다. 말주변이 없는 나도 더듬더듬 열심히 이야기했다. 그런데 딱 한 사람, 사연이 있어 보이는 아가씨만 아무 말이 없었다. 그저 다른 사람의 이야기에 간간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시간이 자정을 넘어가자 팩소주도 동이 났다. 즐거웠지만 온종일 산을 탔으니 다들 피곤했으리라. 누군가 꾸벅꾸벅 졸기 시작하니 곧 자리가 정리되었다. 나 역시 등을 붙이자마자 곯아떨어졌다.
얼마나 지났을까. 나는 메스꺼움을 느끼며 눈을 떴다. 난쟁이가 기어들어가 허파꽈리에 달린 모세혈관을 칼로 잡아째는 것 같은 복통이 엄습했다. 산 중턱에서 따뜻한 물도 없이 급하게 먹은 김밥이 문제였던 모양이다. 신음 소리가 안 나도록 조심하며 끙끙 앓았다. 몸이 덜덜 떨리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겨우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입에 손가락을 넣으니 토사물이 쏟아진다. 열심히 게워내고 있는데 누군가 뒤에서 등을 두드려 주었다. “괜찮아요?” 돌아보니 사연 많아 보이는 아가씨다. 눈을 한 움큼 집어 입을 헹구고 여자의 부축을 받아 다시 자리에 누웠다.
소란스러웠는지 사람들이 “왜 그래?”, “뭔데” 하며 하나둘 깨기 시작했다. 전문산악인 아저씨가 엄지손가락을 따주었다. 대피소 관리인은 소화제를 가져왔다. 아프니 서러웠고 서러우니 눈물이 났다. 조금 지나자 속이 가라앉는 듯했다. 안심했는지 모두들 다시 잠들었다. 사연 많아 보이는 아가씨가 내 눈가를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돌아눕게 하더니 천천히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주위는 양들이 한 마리도 남김없이 사라진 방목지처럼 고요했다. 나는 그만 됐다는 의미로 여자의 손을 잡았다. 따뜻했다. 한동안 놓지 않았다. 어디선가 물 흐르는 소리가 났다. 결국 그날 밤 우리는…….
벌써 십년도 더 지난 일이라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내 등을 쓸어주던 따뜻했던 손만큼은 잊히지 않는다. 무슨 사연이 있어 그녀가 한겨울 설악을 찾았는지는 여전히 알 도리가 없다.
김홍민 북스피어 출판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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