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08.10 19:33
수정 : 2016.08.10 19:53
[매거진 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길게 이어지지 못한 인연에 품은 미련에 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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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허드슨 호크> 포스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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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고에 처박혀 있던 디브이디(DVD)를 우연히 발견했다. 절정의 인기를 누리던 브루스 윌리스가 각본까지 쓰며 야심차게 출연했다가 평론가+관객에게 희대의 망작으로 평가받고 홀랑 망했던 <허드슨 호크>라는 영화다. 이 제목을 기억하는 이가 얼마나 될지 모르겠지만 나는 그런 평가에 동의하지 않는다. <종횡사해>와 <토마스 크라운 어페어>를 비롯한 숱한 ‘도둑놈 영화들’에서 보기 어려운 독보적인 대목이 있기 때문이다. 그게 무엇인고 하니, 브루스가 파트너와 함께 물건을 훔치러 들어간 경매장에서 각자 맡은 바 임무를 수행하기 직전에 타이밍을 맞추는 장면이다. 대개의 도둑 영화에서는 “자, 지금부터 2분30초 후에 다시 여기서 만나자”며 손목시계의 타이머를 맞추지만 <허드슨 호크>에서는 2분30초짜리 노래를 부른다. 다 필요없고 ‘스윙잉 온 어 스타’(Swinging On A Star)를 흥얼거리다가 특정 음계에 이르렀을 때 전기를 차단하는 파트너와 그에 발맞추어 말 조각상을 훔치는 브루스 윌리스의 여유로운 모습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나는 뭐라 표현하기 힘들 만큼 좋았다. 실로 근사한 아이디어 아닌가.
물론 영화니까 가능한 얘기다. 현실에서는 어림도 없지. 지금은 사라진 종로서적에서 친구들과 함께 책을 훔쳤던 기억이 떠오른다. 내가 중학교에 다니던 무렵의 일이다. 이런 표현이 어떨지 모르겠지만 그때는 도둑질이 일종의 통과의례였다. 아니, 남자 중학생들 사이의 담력 시험이라고 할까. 영화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보면 중학생들이 기차가 다가오는 철길에 누워서 ‘누가 끝까지 버티나’로 서열을 정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딱 그거랑 비슷했다. 돈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우리는 몰려다니며 마구잡이로 물건을 훔쳤다. 이때 꽁무니를 빼면 무리에서 소외되고 만다. 그날은 서점이 무대였는데 어설프기만 했던 내가 걸린 거다. 들키지 않은 친구들이 유유히 빠져나가는 동안 나는 사무실로 끌려갔다. 하지만 점원에게 잡힌 책 도둑은 나뿐만이 아니었다. 이미 두꺼운 법전을 손에 든 청년 한 명, 그 앞으로 머리가 벗겨진 중년의 아저씨가 있었다.
“만화책이 보고 싶으면 만화방에 가든가 돈을 내고 사야 할 거 아냐.” 척 보기에도 한참 어려 보이는 점원이 삐딱하게 앉아 눈을 부라리며 쥐 잡듯 호통을 치는 중이었다. 말이 짧았지만 앞에 선 아저씨는 빨개진 얼굴로 땀만 뻘뻘 흘렸다. “당신, 직업이 뭐야.” “중학교에서 탁구 가르치는데요.” “코치야?” “네.” “씨발, 유남규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땄는데 당신은 여기서 만화책이나 훔쳐서야 되겠어? 엉? 그래, 안 그래?” “죄송합니다.” 88올림픽 때 정식 종목으로 채택되어 역사상 최초의 탁구 금메달리스트가 된 유남규 선수는 모르는 사람이 없지만 유남규가 금메달을 땄는데 당신은 여기서 만화책이나 훔쳐서야 되겠냐니, 거기에 대체 무슨 상관관계가 있다는 건지 의아해서 나는 픽 웃었다. 나중에 안 사실인데 직업을 물어본 건 지급능력이 있는지 가늠해보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경찰서에 넘겨봐야 조서를 쓰네 마네 귀찮은 일만 생기니까 적당한 선에서 책값을 지급하게 하려던 거다. 다행히 내 수중에는 돈이 있어서 훔친 책을 구입하는 걸로 타협이 됐지만 코치 아저씨는 무일푼이었던 모양인데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다. 어쨌든 그날 이후 나는 확실하게 값을 지급한 후에 책을 구입하고 있다.
“그 많은 우편물 중에서
그리운 이름을 발견할 줄이야
엽서를 몰래 품 안에 넣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말이 난 김에 부끄러운 고백을 하나 더 하자면 제대하고 복학하기 전까지 일하던 우편집중국에서도 한 번 물건을 훔친 적이 있다. 나는 밤 10시부터 아침 6시까지 서른명 정도 되는 직원들과 함께 근무했는데 그날은 웬일인지 우편물이 현저하게 적어서 일찌감치 파장 분위기였다. 그렇다고 퇴근을 하거나 대놓고 놀 수는 없으니까 다들 요령껏 시간을 때웠다. 나는 슬렁슬렁 엽서를 분류하며 하나하나 내용을 들여다보았다. 그러다가 우연히 모 여대 유아교육과에서 졸업생들에게 보내는 단체 엽서를 발견했다. 그게 왜 시선을 끌었냐면 한때 사귀던 누나가 그 학교 유아교육과에 다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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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천국의 우편배달부>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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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입대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대학 2학년이던 그해 추석을 앞둔 대목에 나는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를 했다. 수삼을 팔았다. 매장은 백화점 직원이 아니라 돈을 내고 입점한 업체 주인이 운영했다. 연배는 우리 엄마랑 비슷하지 않았을까. 호객에 서툰 나를 보며 “사내새끼가 저리 수줍음이 많아서 뭐에 쓰누” 하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이것저것 살뜰하게 챙겨주었다. 매장에는 나 말고 아르바이트생이 한 명 더 있었다. 주인의 조카딸, 나보다 한 살 많았다. 성격이 활달해서 누구든 좋아할 만한 타입이었다.
그러다가 추석 전날인가. 아침에 출근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대뜸 “너네들, 어디 가서 한 시간만 짱박혀 있어라”는 거다. 사연인즉 백화점에서 아르바이트생들을 모아 무슨 강제노역 비슷한 걸 시키려 하는데 이게 엄청 힘든 일이라나. 나와 조카딸은 엄밀하게 따지면 백화점에서 직접 고용한 게 아니니까 나갈 필요는 없지만 눈에 띄면 동원될 수 있다는 이유다. “아침 못 먹었지? 이거나 먹고 와” 하면서 건네준 건 가래떡 두 개와 작은 꿀단지였다. 우리는 시키는 대로 주차장 뒤편 창고에 숨었다. 평소에도 사람의 왕래가 드문 곳이다. 주위는 휴가철의 도서관처럼 조용했다. 우리는 소곤소곤 이야기를 나누며 떡을 나눠 먹었다. 내 손이 좀 지저분하기도 했고 어쩌다 보니 장난처럼 먹여주는 모양새가 됐는데, 세상에 꿀 바른 가래떡이 그렇게 맛있는 줄 처음 알았다. 그날 이후 우리는 사귀었다. 하지만 연애는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일간지 두 면 분량의 에피소드가 있지만, 요약하면 내 잘못이 컸다. 못되게 굴었던 걸 두고두고 후회했다. 한데 그 많은 엽서 중에서 그리운 이름을 발견할 줄 누가 알았겠나. 유아교육 대학원에 진학한 학부 졸업생 모임 안내문인 듯했다. 그걸 직접 전해줘야겠다고 생각한 건 치기였을까 미련이었을까. 나는 엽서를 몰래 품 안에 넣었다. 가슴이 두근거렸다. 나에게 주어진 지면이 여기까지라서 뒷얘기는 상상에 맡기겠지만 그때 우편물을 훔친 일에 대해서만큼은 지금이라도 용서를 빌고 싶다. 그래도 당사자에게는 확실히 전달됐으니 너무 뭐라 하진 마시길.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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