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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24 19:47 수정 : 2016.08.24 20:00

[매거진 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잘나서 미워하고, 그래도 좋아했던 내 짝꿍 성혜에게

<한겨레> 자료사진.

그 아이는 내 짝꿍이었다. 성혜라는 이름이다. 그림을 잘 그렸다. 정물화든 수채화든 뭘 그려도 항상 선생님에게 칭찬을 받았다. 피아노도 잘 쳤다. 음악 시간에 필요한 반주란 반주는 전부 도맡아 했을 정도다. ‘어릴 때부터 양질의 교육을 받아 감각이 뛰어나며 누구에게나 친절한 부잣집 아이’라는 것이 내가 그녀에게 받은 인상이었다. 나는 성혜의 재능이 부러웠다. 왜 내가 그린 그림은 선생님의 눈에 들지 못할까. 왜 나는 반 아이들 앞에서 여봐란 듯이 반주를 맡을 수 없는 걸까. 이 정도면 나도 꽤 잘한다고 생각했는데 칭찬은 늘 성혜 몫이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뭘 그런 걸로 시샘씩이나 했는지 의아하지만 그땐 그랬다.

성혜의 잘함과 나의 잘함은 차원이 다르다, 내가 아무리 노력해도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다는 걸 확인한 순간부터 나는 성혜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애지중지하는 줄 뻔히 아는 학용품을 숨겨놓고 시치미를 떼거나 뾰족하게 갈아놓은 연필로 수업 시간에 선생님 몰래 쿡쿡 찌르기도 했다. 그때 차라리 아이답게 분통을 터뜨려 주었더라면 좋았을걸. 어떤 경우에도 화를 내거나 짜증을 부리지 않았다. 속상한 표정을 짓다가도 이내 친절한 말을 해주었다. ‘괜찮아, 그럴 수도 있지, 뭐’ 하고 한없이 인자한 어른이 까마득하게 어린 꼬마를 바라보는 듯한 얼굴로 방긋 웃으면서. 그 어린애답지 않은 태도에 나는 더욱 심사가 뒤틀렸다. 그럴수록 괴롭힘의 수위는 점점 높아졌다. ‘이래도 화를 안 낼 거야? 이래도?’ 요즘 같으면 학원폭력으로 신고를 당해도 할 말이 없었으리라.

그러다가 딱 한 번, 성혜가 무섭게 화를 낸 적이 있다. 미술 시간이었다. 각자 가지고 온 과일을 책상에 두고 그림을 그렸다. 한데 수업이 끝나고 쉬는 시간이 됐는데도 성혜는 계속 그림에 열중해 있었다. 이제 그만하라고 내가 한마디 했다. 못 들었는지 그럴 필요를 못 느꼈는지 성혜의 붓은 멈출 줄을 몰랐다. 순간적으로 무시당한 기분이 들었다. 괘씸했다. 그래서 내가 어떻게 했냐면 책상 위에 놓인 사과를 한입 깨물어 먹어버렸다. 천연덕스러운 얼굴로. 그때 성혜가 나를 보던 경멸에 가까운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뭔가를 애써 눌러놓으려는 듯한 신음이 입에서 흘러나왔다. ‘낯빛이 창백해진다’는 게 어떤 건지 처음으로 실감했다.

이윽고 뭐라 뭐라 소리를 지르며 내가 베어 물었던 사과를 집어던졌는데 하필 그게 교탁 위에 놓인 화병에 정통으로 맞은 거다. 와장창 하는 소리가 나더니 주변에 있던 아이들이 비명을 질렀다. 교실 안의 모든 시선은 순식간에 한곳으로 집중되었다. 사과를 집어던진 당사자의 커다란 눈에서는 그 큰 눈만큼이나 굵은 눈물방울이 뚝뚝 떨어졌다. 소동은 담임 선생님의 등장으로 마무리되었다. 그는 나를 때리거나 하진 않았다. 다만 혀를 끌끌 차며 “사내새끼가” 어쩌고 하는 말을 했던 것 같다. 그러고는 짝꿍을 바꿔주었다. 나와 성혜 말고도 반 전체의 짝꿍 교체가 단행되었다. 남자는 남자끼리, 여자는 여자끼리. 그 뒤로 학년이 바뀔 때까지 우리는 서로에게 한마디 말도 걸지 않았다.

그러다가 이듬해, 누군가를 통해 성혜의 생일 모임에 와달라는 쪽지를 받았다. 이제는 같은 반도 아닌데.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망설였다. 다른 반이라는 이유보다는 역시 지난번 일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어린 시절에는 더더욱, 나는 요령 있게 사과하는 데 서툴렀다. 그런 주제에, 만약 가게 되면 선물을 뭘 살까 궁리한 걸 보면 이만저만 뻔뻔한 게 아니었구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방과 후에 집으로 돌아와서야 수중에 돈이 한 푼도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맞벌이하시는 부모님이 집에 계실 리 없고 그날따라 동생도 귀가가 늦었다. 책상 서랍을 뒤지고 소파 밑을 훑고 심지어 아버지의 겨울 코트 주머니를 뒤져 마련한 돈은 고작 오백원 남짓. 연필 한 다스도 살 수 없는 돈이었다. 빈손으로는 가고 싶지 않았다.

작년에 같은 반이었다가 지금은 성혜와 한 반이 된 아이들이 집으로 나를 부르러 왔을 때 나는 못 가겠다고 했다. “왜?” “돈이 없어.” 얼마나 있냐고 묻기에 오백원뿐이라고 했다. 그중 태현이라는 친구가 기억난다. 키가 작았고 싸움을 잘했다. 근처 ‘선물의 집’에 가면 그 돈으로도 살 수 있는 뭔가가 있다며 내 손을 잡아끌었다. 못 이기는 척 따라가 보니 브로치였다. 분홍색 자전거 모양으로 포장해 달래기도 민망할 만큼 작았다. 내가 ‘그래도 그렇지 이걸 어떻게’ 하는 표정을 짓자 태현이는 “괜찮아, 새끼야” 하고 내 머리를 툭 치는 시늉을 했다.

성혜네 집은 내가 막연히 짐작했던 것만큼 크지 않았다. 성혜와 꼭 닮은 어머님이 차려주신 조촐한 생일상 앞에서 우리는 노래를 부르고 촛불을 껐다. 이제 각자 준비한 선물들을 꺼내놓을 순서가 되었다. 연필과 공책 세트를 비롯하여 직접 만든 카드와 곰 인형 등이 모두가 지켜보는 앞에서 펼쳐졌다. 내 차례였다. 머뭇거리고 있는데 태현이가 내 손에 있던 포장된 브로치를 빼앗더니 “이건 특별한 선물이니까 너 혼자 있을 때 풀어 봐” 하며 성혜의 손에 꼭 쥐여주었다. 주위에서 가벼운 야유가 일었지만 워낙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라 슬쩍 넘어가는 분위기가 되었다. 다행이다. 나중에 성혜한테 ‘쪽팔릴’ 일만 남았다.

그녀가 나를 보고 웃었다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랐다
창피하게 여긴 내 선물이
왼쪽 가슴에 달려 있었다

다음날. 수업은 한참 전에 끝났다. 나는 청소를 마치고 옆 반과의 축구시합에 늦어 허겁지겁 나가던 참이었다. 4층 복도 저쪽에서 성혜가 보였다.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왠지 모르게 시선을 아래로 향한 채 묵묵히 걸었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 고개를 들었는데 마주 걸어오던 성혜가 나를 보고 싱긋 웃었다. 무더위를 피하기 위해 나간 강변에서 해질 무렵 살랑 부는 바람처럼 부드럽고 기분 좋은 웃음이었다. 갑자기 얼굴이 달아올라 당황한 와중에도 그 아이가 입은 하얀색 스웨터 위로 왼쪽 가슴에 달린 브로치를 나는 똑똑히 볼 수 있었다. 포장해 달래기도 민망할 만큼 작은 분홍색 자전거였다. 나는 계속 걸었다. 운동장에서 공 차는 아이들의 목소리가 어슴푸레 들려왔다. 지금으로부터 스물 몇 해 전, 어느 봄날 오후 무렵의 일이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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