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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12 19:23 수정 : 2016.10.13 11:38

[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취객 싣고 달리는 지하철 막차의 ‘흔한’ 풍경

사진 비주얼 헌트. 그래픽 홍종길 기자 jonggeel@hani.co.kr
예전부터 버스와 지하철 가운데 하나를 골라야 하는 기로에 서면 망설임 없이 지하철을 택했다. 거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는데 그중 하나는 멀미 때문이다. 그다지 허약한 체질이 아니었음에도 어릴 때부터 나는 버스만 탔다 하면 금세 머리가 아프고 속이 메스꺼워져서 고생하곤 했다. 음식물을 섭취하고 얼마 지나지 않았을 경우에는 이런저런 내용물을 왕창 게워내는 일도 있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버스를 타야 할 운명이 도래할 것 같으면 가방 안에 검은 비닐봉지를 준비해 놓았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몸과 마음이 다 자란 지금까지도 책을 보거나 신문을 뒤적이는 건 엄두도 내지 못한다. 대관절 왜 지하철에서는 1000여 페이지에 달하는 레이먼드 카버의 전기를 읽어도 멀미는커녕 평소보다 더 집중이 잘되는 반면, 버스에서는 정기 구독하는 <한겨레>만 들여다봐도 허파가 울렁울렁 뒤집어지는 듯한 괴로운 기분이 드는 건지 알다가도 모르겠다. 하긴 요즘 세상 돌아가는 일에 관한 기사를 가만히 읽고 있노라면 허파든 뭐든 뒤집어지지 않는 게 이상한 일인 것 같기도 하지만.

어쨌거나 그런 까닭으로 버스보다 지하철에서 압도적으로 많은 시간을 보냈고 덕분에 흥미로운 경험도 할 수 있었다. 그것은 좌석이 일괄적으로 전방을 향하고 있는 버스와 마주보고 놓인 지하철의 구조에서 기인한 것 같기도 하고 전자에 비하면 후자 쪽에 몇 배나 되는 사람들이 더 많이 탑승해서가 아닐까 짐작해 보곤 하는데 여하튼 기억에 남을 만큼 특이한 일은 대부분 지하철에서 목격하거나 당했다. 때때로 불쾌하거나 눈살이 찌푸려지는 일도 있었지만 그건 다음에 시간이 나면 읊조려 보기로 하고 오늘은 기이한 일화를 한 자락 끄집어내 볼까 한다.

합정역에서 마포구청역 방향으로 향하는 6호선 막차 시간은 0시52분이다. 홍대나 신촌 일대에서 한잔하고 마포구청역 근처에 있는 집까지 도저히 걸어갈 자신이 없는 날은 이 시간에 맞춰 지하철을 탄다. 막차는 0시52분에 도착하지만 곧장 출발하지 않고 합정역에서 대기할 때가 있다. 그 시간 언저리에 연계전철인 2호선에서 내려 6호선으로 갈아타려는 승객을 위한 배려다.

5주에 걸쳐 엑스플렉스에서 ‘1인 출판 스타트업’ 강의를 한 마지막 날, 나는 아쉬운 마음에 뒤풀이라는 명목으로 수강생들과 진탕 마셨다. 진탕이라고 해봐야 주량이 뻔해서 다행히도 막차 시간에 맞춰 전철을 탈 수 있었다. 2호선에서 내리자마자 환승을 위해 부지런히 뛰어갔을 때 6호선 열차는 곧장 출발하지 않고 정차 중이었다. 객차에 드문드문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이 시간대의 지하철 분위기는 아마 글을 마주할 형제자매님들도 쉽게 짐작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앉아 있는 사람들은 대부분 취객이었다. 완전히 곯아떨어진 이들도 몇몇 보였다. 자리에 앉아 한숨을 돌리며 ‘대기 시간이 오늘은 좀 기네’ 하고 나는 생각했다.

그때였다. 아마도 폭음을 한 듯한 여자가 비틀거리며 들어오더니 쿵 하고 객차 바닥에 쓰러지는 게 아닌가. 그것은 슬랩스틱 코미디의 한 장면을 떠올리게 했다. 무릎을 구부리거나 바닥에 손을 먼저 짚지도 않은 채, 청소를 마치고 교실 뒤쪽에 세워둔 대걸레 자루가 중심을 잃고 넘어지듯 머리부터 바닥을 향하여 똑바로 떨어졌는데 그 “쿵” 하는 소리가 심상치 않은 기분이 들 만큼 컸다. 그러고는 꼼짝도 하지 않았다. 엎어진 그대로 널브러진 채 마치 죽은 것처럼.

비틀대는 여자가 들어오더니
쿵, 그대로 바닥에 쓰러졌다
맨정신으로 지켜본 이는 셋
누가 도울까 눈치보는 새 그녀는…

문제는 그 장면을 바라보던 이가, 즉 멀쩡한 정신을 가지고 이 상황을 목도한 것으로 보이는 이가 내 앞에 앉아 있던 연인뿐이었다는 거다. 우리는 잠시 눈빛을 교환하며 이 사태를 어떻게 수습해야 하나 고민했다. 나는 분명히 그렇게 생각했고 상대들도 그리 생각했으리라 짐작한다. 그것은 다소 곤혹스럽고 쓰러진 여자분께는 미안한 말이지만 약간 웃기기도 한 상황이었다. 잠시 후 연인 쪽의 여자가 남자를 팔꿈치로 쿡 치며 말했다. “자기가 어떻게 좀 해봐.” “내가 뭘 어떻게 해.” “엄청 세게 넘어진 것 같은데 119라도 불러야 하는 거 아냐?” 그랬다. 지하철은 여전히 정차 중이었고 여자는 미동도 하지 않았으며 플랫폼에는 도움을 청할 만한 승무원이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어쩌면 정말, 바닥에 쓰러진 여자는 크게 다쳤을지도 모른다. 누군가가 나서서 무슨 조치를 취해야 하는 건지도 모른다. 공연히 귀찮은 일에 휘말릴까 싶어서 내내 딴청을 부리던 내가 하는 수 없이 어떻게든 하기 위해 움직이려는데 연인 쪽의 남자가 먼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머뭇거리며 객차 한쪽에 있는 비상스위치를 눌렀다. “삐-” 하는 버저 음이 울렸다. 버저는 차량을 운행하는 기관사실로 연결돼 있는 듯했다. 저쪽 너머에서 마이크를 켜는 소리가 부스럭부스럭 들렸다.

잠시 후 “네, 무슨 일이십니까” 하는 대답이 돌아왔다. 남자는 더듬는 말투로 입을 열었다. “어, 저기요.” “네, 말씀하세요.” “여기, 그러니까” 하고 남자가 말을 이어가려던 찰나, 쓰러졌던 여자가 벌떡 일어났다. 그것은 흡사 좀비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비칠비칠 걸어 유유히 객차 밖으로 사라져 버렸다. 나도, 기관사실에 연락을 취하던 남자도 소가 담 넘어 가는 걸 구경하듯 멍하니 입을 벌린 채로 그쪽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 다시 한 번 “무슨 일이십니까” 하며 재촉하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방금 눈앞에서 전개된 일을 제대로 설명할 자신이 없었던 남자는 “저기, 그러니까”를 두 번쯤 반복하다가 이렇게 말했다. “느, 늘 안전운전 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도 수고하셨어요.” 더듬거리는 남자의 얘기를 들으며 나와 남자의 애인은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남자가 빨개진 얼굴로 자리에 돌아오자 여자는 “자기는 무슨 바보 같은 소리를 하고 있어” 하고 남자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또 한 번 쿡쿡- 웃었다. 그러게, 참으로 센스 없는 형제님이네. 나라면 “파업을 지지합니다. 반드시 승리하세요”라고 말했을 텐데. 하긴, 선뜻 나서지도 못하고 미적거린 주제에 이런 말을 할 처지는 아니지만.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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