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0.26 19:22
수정 : 2016.10.26 19:47
[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베테랑 인쇄기장 앞에서 숨죽이던 ‘미생’ 편집자의 고군분투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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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미향 기자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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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을 졸업하자마자 출판사에 입사했다. 지금이야 서울북인스티튜트(SBI)나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 관련 프로그램이 제법 생겼지만 당시에는 나 같은 인간이 출판에 관해 공부할 수 있는 기관 자체가 없었다. 당연히 실무는 전혀 몰랐다. 한 명뿐이었던 편집자가 하루 이틀 사이로 퇴사하는 바람에 ‘다정한 사수로부터 일처리를 배울 수 있어서 다행이야’라는 낙관적 전개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새로운 임무가 닥칠 때마다 출판사나 잡지사에 다니는 선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묻는 게 유일한 해결책이었다.
필자들이 쓴 원고를 매만지는 일도, 디자이너에게 표지 디자인 콘셉트를 설명하는 일도, 언론사에 보도자료를 보내는 일도 버겁기만 했다. 그래도 이런 일들은 요컨대 질문의 방향만 정확히 찾을 수 있으면 일단 묻고 고민하고 다시 묻는 과정에서 어떻게든 해결할 수 있었다. 요령이라고 할까, 시간이 지날수록 달팽이가 꿈틀하는 정도로 미세하게나마 실력도 느는 듯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적응되지 않는 업무가 있었으니 인쇄소에 감리를 하러 가는 일이었다.
이쯤에서 간단히 ‘인쇄 감리’가 무엇인지 설명해 보고자 한다. 편집자가 콘셉트를 잡으면 디자이너와 상의하여 표지를 만든다. 이때 결과물을 컴퓨터 화면으로 봐서는 색의 차이를 판별하기 어려우니 전문 업체에 의뢰해 교정지를 출력한다. 교정지는 가상의 표지, 혹은 ‘미리 만들어 본 샘플’ 정도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가상의 표지는 인쇄소에 전달된다. “여기에 구현된 색과 똑같이 실제 표지를 인쇄하면 됩니다”라는 뜻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인쇄라는 건 제아무리 똑같은 잉크로 찍었더라도 언제, 어디서, 누가 보느냐에 따라 색상이 다르게 느껴질 수 있다. 하나의 결과물을 두고 인쇄소 기장이 볼 때는 “교정지와 실제 표지가 완전히 같아!”지만 편집자(또는 디자이너)가 볼 때는 “교정지와 실제 표지가 미세하게 다른데?” 하는 상황이 발생할 수 있는 것이다. 이 미세한 차이를 없애려고 편집자(또는 디자이너)는 표지가 인쇄되기 직전에 시험인쇄를 하는 동안 인쇄기 옆에 서서 기장에게 “먹색 약간만 올려주세요”라거나 “적색 조금만 내려주세요” 같은 지시를 내린다. 이러한 일련의 과정을 ‘인쇄 감리’라고 한다.
‘감독하고 관리함’, 국어사전은 감리의 뜻을 이렇게 풀어놨다. 나만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우호적인 느낌은 아니다. 처음 감리를 하러 갔을 때의 내 나이는 스물일곱살이었다. 경기 고양 일산에 있는 인쇄소에 도착해서 그동안 전화로만 통화했던 담당자에게 “감리하러 왔는데요”라고 얘기했더니 그는 사무실에 있는 의자를 가리키며 잠시 기다리라고 했다. 족히 한 시간이 지나도록 아무런 기별이 없었다. “저희 책 인쇄는 언제 시작하나요”라고 물어도 ‘때가 되면 어련히 알아서 찍지 않겠느냐’는 투의 대답이 돌아왔다.
내가 소속된 출판사의 매출이 소소하다 해도 틀림없이 합당한 비용을 지불할 텐데 내가 왜 이런 대우를 받아야 하는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다. 꿔다 놓은 보릿자루, 일각이 여삼추, 배고파, 집에 가고 싶다, 오늘 안에 찍긴 찍는 건가 같은 생각이 꼬리를 무는 가운데 드디어 인쇄기 쪽으로 오라는 얘기를 들었다. 가보니 아버지뻘 되는 기장님이 기계를 조작하며 표지를 찍으려는 참이었다. 딱 보기에도 전문가 포스가 물씬 풍겼다. 내가 이 책의 편집자라고 인사하자 그도 인사를 했다. 그런데 어째 좀 건성이라는 기분이 들었다.
난리통에 헤어진 아들을 다시 만났다는 반응을 기대한 건 아니지만 반갑게 웃으면서 “오래 기다리셨다”는 말쯤은 해줄 수 있는 거 아닌가. 뭐, 좋다. 낯을 가리거나 내성적인 성격일 수도 있으니까 그건 그렇다 치자. 궁금한 게 있어서 질문을 하면 하나같이 퉁명스런 얼굴로 대답하는데 ‘똥이랑 된장도 구별 못 하는 책상물림이 어디 와서 감 놔라 배 놔라냐’며 비웃는 듯한 기운이 온몸에서 감지됐다. 시종일관 노골적으로 귀찮다는 표정이었다. 내가 무슨 장그래도 아닌 마당에 ‘모르니까 가르쳐주실 수도 있잖아요’라는 말이 혀끝을 맴돌았다. 서러워서 눈물이 날 지경이었다.
갈 때마다 싸늘한 반응에
우울해 밥도 안 넘어갔다
그러던 어느날
두손 가득 간식을 들고 갔더니…
내 생애 첫 감리가 어떻게 끝났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12라운드까지 뛰었는데도 심판의 석연치 않은 판정으로 분패한 권투 선수처럼 터덜터덜 출판사로 돌아오던 장면이 떠오른다. 되게 억울했다. 이런 경험은 두 번 다시 하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다음번에도 그 다음번에도 비슷한 상황이 반복됐다. 오죽하면 우리 아버지가 인쇄소 사장님이 되는 꿈을 꾸다가 깨곤 했을까. 과장이 아니다. 감리가 있는 날은 아침부터 우울했다. 밥을 먹으면 넘어가지 않고 목구멍에 쌓이는 기분이었다.
계속 이러다간 만수무강에 지장을 초래하겠다 싶은 생각이 들 때쯤 내 성정에 어울리지 않는 꾀를 냈다. 인쇄소는 대개 땅값이 상대적으로 저렴한 일산에 자리했고 십여 년 전만 해도 인근에는 겨우 구멍가게가 한두 개 있는 정도였다. 감리하러 들어가기 전에 나는 가급적 인쇄소 주변에서 살 수 없는 음료수며 빵을 잔뜩 샀다. 그러고는 현장에서 일하는 기장과 스태프에게 나눠주었다. “아직 잘 모르지만 가르쳐주시면 열심히 배울게요”, 하여간 그 비슷한 말도 했다. 힘닿는 데까지 최선을 다해 살갑게 굴었다.
“쯧쯧, 치사하게 먹을 걸로”라며 혀를 차실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지만 딱히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 않았다. 다음번에도 그 다음번에도 두 손 가득 간식을 들고 방글방글 열매를 먹은 것처럼 인사했다. 감리를 마쳤다고 홀랑 돌아서지 않았다. 인쇄가 마무리되는 걸 끝까지 지켜보았다. 그러던 어느 날의 일이다. 작업이 끝나자 마침 점심시간이었는데 기장이 고개를 살짝 틀며 무표정한 얼굴로 말했다. “밥 먹고 가요.” 경험해보진 못했지만 누구한테 “라면 먹고 갈래요?”라는 말을 들으면 이때랑 비슷한 기분이 들지 않을까.
십여 년이 지난 오늘까지도 인쇄소 인근의 허름한 식당에서 먹은 그날의 밥맛을 떠올리곤 한다. 예비군 훈련장에서나 쓸 법한 식판과 달걀물에 발가락만 담근 듯한 분홍색 소시지와 원래 이름은 임연수어지만 흔히 ‘이면수’라고 부르는 생선과 된장국 같기도 한 시래깃국도 함께. 맛있었다, 정말.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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