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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09 19:26 수정 : 2016.11.09 19:43

[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실력이 안 되면 알아서 내려와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 ‘수영장의 결투’

수영을 하고 있는 어린이들. 이정아 기자 leej@hani.co.kr
전적으로 엄마의 의지에 따라 어릴 때부터 이런저런 학원에 다녀야 했다. 대충만 꼽아 봐도 서예학원, 주산학원, 암산학원, 피아노학원, 컴퓨터학원, 그야말로 학원 인생이었다. 국민학생이 그 많은 걸 어떻게 다 배우러 다녔을까 싶지만 당시에는 주위 친구들이 대부분 비슷한 일정을 소화했다.

현상으로서는 이것도 꽤 흥미로운데 ‘전교 1등 아무개가 어디 학원에 다닌다더라’는 말을 들으면 엄마는 제꺼덕 그곳에 나를 집어넣었다. 사정은 다른 집도 마찬가지여서 자연스럽게 이 학원에 가도 저 학원에 가도 같은 친구들이 있었다. 그러한 교육의 효과는? 전혀 없었다. 적어도 내 경우에는 그랬다. 심지어 웅변학원에도 다녔는데 ‘조리 있고 막힘없이 당당하게 말하기’는 개뿔, 최근까지도 하루가 멀다 하고 “말씀이 참 없으시네요”, “원래 그렇게 과묵하신가요”라는 핀잔을 듣고 다니는 상황임을 감안하면 수강료만 날린 게 분명하다 싶어 엄마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 정도다.

하지만 딱 하나, 고생스럽긴 했어도 배워두길 잘했다 여기는 게 있다. 수영이다. 지난번에 잠깐 언급했듯 나는 일곱 살인가 여덟 살 때부터 와이엠시에이(YMCA) 아기스포츠단에 다녔다. 여길 학원이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다른 데와 달리 입학이 상당히 어려웠다고 한다. 수강료도 비싸고. 엄마는 종종 “야 이 새끼야, 너를 거기 보내려고 내가 대기표 받고 밤새 줄을 서서” 어쩌고 하는 고생담을 전가의 보도처럼 꺼내곤 한다. 나중에 효도하라는 의미가 담긴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의 수영장 버전이다. 수영을 할 때마다 ‘어머님 은혜’가 읊조려지는 건 그래서인가 보다.

물론 꼬맹이가 그딴 걸 알 턱이 없다. 은혜는커녕 그 숱한 학원 중에서도 최고로 가기 싫었다. 꼭두새벽에 일어나야 했기 때문이다. 구의동에서 종로 와이엠시에이까지는 버스로 한 시간이 걸린다. 강습에 한 시간, 돌아오는 데 한 시간이라는 일정을 등교 전에 마치려면 새벽 다섯 시에 일어나야 했다. 한겨울에도 부모님 방의 자명종은 어김없이 울렸다. 키가 클 거라는 믿음으로 엄마가 준비한 미제 우유와 미제 초콜릿을 비몽사몽간에 먹고 해 뜨기 직전의 캄캄한 새벽길을 와들와들 떨며 걸어갈 때는 혼이 비정상이 되는 기분도 들었다. 길은 또 왜 그리 미끄러운지. 내일은 어디 넘어져서 다리라도 부러졌으면 하고 나는 밤마다 기도했다. 안타깝게도 누구와 달리 ‘영빨’이 형편없었던 관계로 그 소망이 이루어진 적은 없다. 엄마가 잠든 틈에 자명종을 몰래 숨겨놨다가 다리가 부러지도록 얻어맞은 적은 있지만.

처음으로 이 운동의 덕을 본 건 군대에서였다. 나는 말단 소총수로 강원도 철원에 있는 3사단에서 복무했다. 군대 이야기라면 다들 눈살을 찌푸릴 것 같은데 그래도 한번 들어보시라. 입대하고 6개월이 지났을 무렵의 일이다. 대개 유격 훈련과 혹한기 훈련을 군 훈련의 쌍두마차로 친다. 그해 여름 우리 부대도 유격이 예정돼 있었다. 훈련 일정이 통보되자 선임병들 입에서는 곡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같은 이등병은 그런 분위기만으로도 겁을 집어먹었다. 한데 유격장으로 떠나기 이틀 전인가 각 중대로 ‘라이프가드 자격증을 가진 병사가 있는지 조사하라’는 명령이 하달되었다. 영문도 모른 채 손을 들었던 나는 훈련 전날 사단 휴양소로 차출됐다. 그곳에서 뭘 했느냐. 유격장을 뛰어다닌 부대원들에게는 미안하게도, 장교들이 이용하는 수영장의 인명구조 의자에 앉아서 한가로운 일주일을 보냈다.

딱 봐도 나보다 빨랐지만
선두를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그가 ‘맞짱’을 신청했다
결과는 개망신, 참담했다

뭐든 배워두면 언젠가 써먹을 날이 온다는 것을 나는 이때 실감했다. 꼭 그런 이유 때문만은 아니지만 제대 후에도 수영만큼은 꾸준히 배우러 다니고 있다. 아니, 나름대로 경력이 쌓였으니 배우기보다 수련한다고 할까. 일반적으로 강습은 초급반, 중급반, 고급반, 마스터반으로 나눠서 진행하는데 내가 속한 마스터반에는 상당한 실력의 소유자들이 나오니까 강사가 뭘 가르치거나 하진 않는다. 그렇다면 자유수영을 할 일이지 뭐하러 비싼 수강료를 내는 거냐. 내가 해보니 자유수영이란 게 숨이 차면 금방 쉬게 되더라. 반면 마스터반에서 경력자들과 함께하면 힘들어도 쉴 수가 없다. 강습은 뒷사람이 앞사람을 따라가는 일렬종대 구조로 진행되는데 내가 쉰다고 서버리면 뒷사람의 진로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다. 앞사람과의 격차가 벌어져도 민폐이긴 마찬가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뒤에 있는 사람이 나보다 빠르다 싶으면 “먼저 가시죠” 하고 순서를 바꿔주는 게 당연한 예의가 되었다. 그래야 정체되는 일 없이 모두가 원활하게 운동할 수 있다. 그런 식으로 나가다가 내가 선두에 서게 된 건 삼 년쯤 전부터였다. 당연한 결과라 여겼다. 제일 빨랐으니까. 아침마다 요령 피우지 않고 한 보람이 있구나 생각했다. 그런데 지지난달에 새 수강생이 마스터반에 들어왔다. 좋은 체격에 키도 껑충했다. 미국에서 대학에 다니는 동포인데 방학이라 3개월만 지낼 요량으로 입국했다고 들었다. 수영장 옆에 살았다던가. 하여간 엄청 빨랐다. 스트로크 자세가 유연하고 발차기도 발군이었다. 순식간에 그가 바로 뒤까지 왔을 때 나는 살짝 긴장했다. 딱 봐도 나보다 빨랐지만 선두를 양보하고 싶지 않았다. 3개월 뒤에 미국으로 갈 거잖아. 아직 강습의 룰도 제대로 모를 테고. 무엇보다, 바꿔주지 않는데 어쩌랴 하는 심보였다. 그런데 어느 날 그가 묘하게 어눌한 발음으로 이렇게 물어보는 거다. “헤이, 끝나고 나랑 시합 한판 해쉴래요?”

와, 진심으로 놀랐다. 미국에서 오래 살아 그런가. ‘이게 무슨 수영 꿈나무 선발대회도 아닌 마당에 너랑 시합을 왜 하냐’고 마음속으로 중얼거렸지만 일단은 “제가 일이 바빠서” 하고 정중하게 거절했다. 이쪽에서 뭉개면 적당히 넘어가겠거니 여겼다. 아니었다. 재차 ‘시합 한판’ 요청이 이어졌다. 그쯤 되니 계속 거절할 수가 없었다. 마침내 몇몇 수강생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오케이 목장의 결투’가 성사되었다. 종목은 50미터 자유형. 결과는, 참담했다. 25미터 턴 지점부터 격차가 확연하게 드러났다. 애초에 양보했다면 모양새도 좋았을 텐데. 공연한 고집을 부리다가 이게 무슨 개망신인가. 덕분에 인생의 교훈을 하나 더 얻었다. “그러니까 실력이 안 된다 싶으면 알아서 내려올 줄도 알아야 합니다요” 하고 누구한테도 좀 충고해 주고 싶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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