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6.12.07 19:46
수정 : 2016.12.07 20:26
[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더러운 듯 가슴 아픈 어느 한겨울 철책의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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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방송 드라마 <태양의 후예> 한 장면. 한국방송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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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릴 때는 그다지 없었는데 나이를 먹으면서 생긴 안 좋은 습관 가운데 하나가 식탐이다. 배가 터질 것 같아도 눈앞에 음식이 있으면 없어질 때까지 계속 주워 먹는다. 문제는 이게 요즘처럼 책이 안 팔려서 불안하거나 원고 마감에 쫓겨 스트레스를 받을 때는 더 심하게 발현된다는 거다. 머릿속에서는 위험하다는 신호를 강렬하게 보내지만 어찌 된 일인지 별도의 자아가 있는 것처럼 손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일쑤다. 오늘만 해도 <제이티비시>(JTBC) 뉴스가 시작할 때 뜯은 1㎏짜리 누룽지 한 봉지를 앵커 브리핑이 끝나기도 전에 탈탈 털어 바닥까지 다 긁어 먹었다. 1㎏이면 4~5인분인데 세상에 아무리 씹을 것들이 많이 보였어도 그렇지 몽땅 다 먹다니 어이가 없다.
소설 <영웅문>에는 홍칠공이라는 절정의 고수가 오른손인지 왼손인지 하여간 한쪽 손의 손가락이 잘린 채로 등장하는데 주인공의 물음에 “음식만 보면 경거망동하는 버릇을 고치기 위해서 식지(食指)를 잘랐네” 하고 단호하게 대답하는 장면이 나온다. 당시에는 엄지손가락과 가운뎃손가락의 사이에 있는 둘째 손가락을 왜 ‘식지’라고 부르는지도 의아했지만 그렇다고 손가락을 자르는 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지금에 이르러서는 홍칠공씨의 심정도 조금쯤 알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두 달에 한 번가량 내가 혼자 사는 집에 들르는 엄마가 “너는 뭘 그렇게 잘 처먹어서 볼 때마다 피둥피둥 살이 찌는 거냐”며 <헨젤과 그레텔>에 등장하는 마녀나 읊조릴 법한 소리를 퍼부을 때는 더욱 그렇다.
하지만 이렇듯 왕성한 식욕을 자랑하는 나도 ‘이것만은 먹지 않는다’는 음식이 있다. 하나는 간장게장이고 다른 하나는 약과다. 혹시 갑각류 알레르기라고 들어보셨는지. 게나 새우를 익혀서 먹을 때는 멀쩡하다가 날것 그대로 흡입하면 입술과 식도가 팅팅 붓는, 일종의 병적 증상이다. 어릴 때는 이상이 없었더라도 후천적으로 생길 수 있다고 한다. 나도 서른 넘어 회식자리에서 아무런 방비 없이 잔뜩 먹었다가 하마터면 큰일 날 뻔한 바람에 인터넷을 뒤져보니 그런 질환이 떡하니 검색되었다. “그렇다고 어떻게 간장게장을 포기해요. 저는 그냥 날 잡아서 실컷 먹고 끙끙 앓아요”라는 분의 사연도 보이던데 나는 아직 그 정도까진 아니니까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약과는 군복무 시절의 어떤 기억과 얽혀 있다. 또 군대 얘기라 송구한데 이번만 참고 들어주시라. 6개월에 한 번씩 후방부대와 번갈아가며 특정 섹터를 지켜야 하는 시스템에 따라, 일병이 되었을 때 내가 있던 부대는 지오피(GOP)에 들어갔다. 철책이라고도 불리는 이곳은 경계초소와 대기초소, 그리고 소초로 이루어져 있다. 소초는 병사들이 잠을 자거나 생활하는 곳이고 경계초소는 24시간 총을 들고 근무를 서야 하는 곳이다. 근무는 전반야(낮)와 후반야(밤)로 나뉘는데 소대별로 서른 명 정도의 인원이 돌아가며 맡는다. 이 ‘돌아가며’라는 것은 예를 들면 이런 거다. 1초소, 2초소, 3초소(대기초소)가 있다고 치자. 전반야 근무자들이 소초에 들어와서 취침하는 동안 후반야에는 선임병(사수)과 후임병(부사수)이 한 조를 이루어 각각의 초소에 투입된다. 한곳에 오래 있으면 주의력이 떨어질 수 있으니 대략 한 시간쯤 경계근무를 선 1초소 근무자들은 2초소로 이동하고 2초소 근무자들은 3초소로 이동하여 휴식을 취하다가 다시 1초소로 순환하는 것이다.
이를 밀어내기식 근무라고 하는데 짝을 이룬 조의 계급이 상대적으로 높으면 3초소에서 휴식을 충분히 취하고 느릿느릿 1초소로 이동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다들 짐작하겠지만 그 시간만큼 1초소 근무자들이 2초소에 늦게 도착하면 2초소 근무자들이 고스란히 피해를 떠안는다. 휴식시간이 줄어들기 때문이다. 하지만 ‘계급이 깡패’니까 어쩔 수 없다. ‘이럴 줄 알았으면 군대 일찍 올걸’ 같은 한탄이나 할 뿐이다. 그렇다면 대기초소에서는 뭘 하느냐. 주로 라면이나 건빵 따위를 먹는다. 담배를 피우거나 오래 참았던 용변을 해결하기도 한다. 초소 사이의 거리가 제법 멀어서 충분히 감안하지 않으면 낭패를 보는 경우가 많으니까 짬밥이 안 되는 계급이 조를 이룬 경우에는 3초소에서도 마음 편히 시간을 보내기 어렵다.
그날은 하필 눈이 많이 내렸다
화장실 간 부사수가 안 돌아왔다
녀석을 찾으러 간 그곳에선
좀비 시체 뜯어먹는 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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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과. 비주얼헌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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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은 하필이면 눈이 많이 내렸다. 채 익지도 않은 컵라면을 위장에 들이붓다시피 허겁지겁 먹고 잠시 담배를 피우는데 배를 부여잡고 화장실에 간 부사수가 돌아올 생각을 않는 거다. 2초소 근무자 중 사수가 왕고참이라서 늦게 가면 소대가 뒤집어지리라는 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지금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당시 철책 부대에 지어진 화장실은 모두 ‘푸세식’이었다. 나는 ‘이 인간이 대체 뭘 하는 거야’ 하고 투덜거리며 밖으로 나갔다. 화장실은 야외에 있었다. 그런데 근처에 도착했을 때 묘한 소리가 들렸다. 한밤중에 무덤에서 깨어난 좀비가 쩝쩝거리며 시체를 뜯어먹는 공포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하는 소리였다.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살짝 문을 두드리며 말했다.
“시간 다 됐어.” “알겠습니다.” “늦게 가면 난리 난다.” “금방 나가겠습니다.” 하지만 이내 ‘쩝쩝’과 ‘뿌지직’ 소리가 동시에 들려왔다. “근데……, 너 뭐 먹냐?” 잠시 정적이 흘렀다. “약과……, 먹지 말입니다.” 그랬다. 그는 안에서 용변을 보며 약과를 먹고 있었던 것이다. 초코파이와 약과는 보관의 용이성과 높은 열량으로 부대원들의 사랑을 받는 간식거리다. 경계근무에 나갈 때도 몰래 한두 개씩 건빵주머니에 챙겨둔다. 밤과 낮이 바뀐 생활, 새벽녘에 급히 먹은 컵라면, 시간은 모자라고 아직 배가 고팠던 이등병은 고참의 눈을 피해 경계근무 투입 시 휴대가 금지된 취식물을 꺼냈으리라. 그것은 참으로 서글프고도 가슴 쓰린 광경, 아니 소리였다.
요즘도 나는 약과를 보면 한겨울 철책 화장실의 광경이, 아니 소리가 들리는 듯한 착각에 빠지곤 한다. ‘쩝쩝’과 ‘뿌지직’이 동시에 울려 퍼지는 그 서글픈 소리 말이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약과를 먹지 않게 되었다. 지저분해서가 아니다. 어디까지나 가슴 아픈 기억이어서다. 지금쯤은 철책의 화장실도 수세식으로 바뀌었으려나. 부디 바뀌었기를, 멀리서나마 마음속으로 기원해 본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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