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나는 왜 연예인 사인에 시큰둥해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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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브이엔 드라마 <응답하라 1988>의 정봉이네 식구들. <한겨레> 자료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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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인 받으려는 아이들로 학교 난리
“내가 받아다 줄게” 호기 부렸지만
돌아온 건 담임의 ‘묻지마 따귀’ 한데 6개월이 지나고 1년이 지나도 별말이 없는 거다. 왜일까. 상대가 슬쩍 꺼내 주면 내 마음도 편할 텐데. 그렇게 이제나저제나 하다 보니 어느새 3년을 훌쩍 넘기고 있다. 정확히는 3년 하고 6개월. 그동안 꽤 많은 책을 소개했는데, 책을 소개하기 위해 그보다 갑절이 넘는 책을 들여다봐야 했다. 내 게으른 성정으로 미루어 방송이 아니었으면 헛되이 보냈을 시간이다. 그 점에서는 무척 만족한다. 또 하나 만족스러운 점은 방송국에 출입하는 동안 티브이에 출연하는 사람들을 숱하게 목도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얼마 전에는 소지섭씨와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기도 했다. 잘생기긴 잘생겼더라. 얼굴도 조그맣고. 신기했다. 이런 얘기를 친구한테 했더니 대뜸 “진짜? 그럼 사인 하나만 받아다 줘”란다. “사인? 받아서 뭐하게.” “하긴 뭘 해, 그냥 받는 거지.” 티브이에 출연하는 사람에게 받은 사인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계신 분들을 비하하려는 의도는 없다. 하지만 나는 예전부터 사인을 받아서 뭐하나 싶은 마음에 제아무리 유명한 연예인을 만나도 “저기, 사인 좀” 하며 종이를 들이밀어 본 적이 거의 없다. 어떤 작가가 ‘여행 가서는 사진을 찍지 않는다, 직접 내 눈에 담기 위해 노력한다, 사진 찍는 것 자체가 시간 낭비’라는 식으로 여행기에 적어놓았던데 굳이 말하자면 그런 심정과 비슷하겠다. 대화를 나누거나 악수를 하거나 사진을 찍는 건 괜찮지만 사인은 의미 없다고 생각하는 건 대관절 무슨 심보인지.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하고 짚이는 사건이 있긴 있다. 혹시 ‘북청 물장수’라고 아시려나. 장두석, 조금산, 이봉원, 이경애, 임미숙씨가 출연한 <유머 1번지>의 한 코너다. “아유, 웬수덩어리”, “꼬리 치는 거예요” 같은 유행어를 만들어내기도 했는데 사람들의 기억에서 완전히 잊혔다가 “반갑구만, 반가워요”가 다시 회자되며 이런저런 매체를 통해 소개된 바 있다. <응답하라 1988>에서 극중 덕선이 걸핏하면 써먹은 덕분이다. 그 “반갑구만, 반가워요”를 만든 조금산씨가 ‘북청 물장수’에서 매번 “아이고, 장 사장” 하고 등장하는 장면이 눈에 선하다. 그는 심형래씨가 주인공으로 나오는 영화에도 왕성하게 출연해서 초등학생들에게 인기가 많았다. 하루는 조금산씨가 내가 다니던 초등학교에 왔다. 아마 영화 촬영 때문이었을 게다. 누군가의 “조금산이다~” 하는 고함에 창밖을 내다보던 아이들이 손에 연습장이며 메모지를 들고 앞다투어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나도 궁금하긴 했지만 꼼지락거리기가 귀찮아서 가지 않았다. 그런데 교실 앞문이 쾅 하고 열리더니 담임 선생님이 빨개진 얼굴로 “반장, 지금 나간 놈들 당장 들어오라고 해”라는 거다. 뛰어나간 애들은 이내 줄줄이 소환되었다. 듣자 하니 사인은커녕 차 문을 꽉 걸어 잠근 조금산씨의 얼굴에는 귀찮아하는 기색이 역력하더란다. 소동이 가라앉자 담임 선생님은 “이 시간 이후로 운동장 나갔다가 걸리면 혼날 줄 알아. 1교시 수업 준비나 해”라며 엄포를 놓고는 조회를 마쳤다. 선생님이 잠시 자리를 비운 사이에 내 뒤에 앉은 미선이가 입을 댓 발쯤 내밀더니, 다른 반 애들은 다 받아왔던데 우리 반만 그러는 법이 어딨냐는 둥, 총각인 담임이 자기보다 인기 많은 남자에게 질투하는 거라는 둥 투덜거리며 사인 받고 싶다고 노래를 불렀다. 그 말을 듣자마자 나는 벌떡 일어나 “내가 받아다 줄게” 하며 운동장으로 달려 나갔다. 거기에는 미선이에게 멋있어 보이고 싶다는 유아적 심리와 담임 선생님의 처사에 대한 불만과 반감이 어우러져 있었으리라. 문제는 왁자지껄 모여 있는 다른 반 애들의 틈바구니에서 가까스로 사인을 받고 난 이후였다. 교실에 들어가니 여느 때라면 교무실에 있어야 할 담임 선생님이 교탁 앞에서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어라, 들켰네. 화장실 청소쯤을 예상했는데 웬걸, 다짜고짜 따귀를 때리는 거다. 태어나서 따귀는 처음 맞아봤다. 어안이 벙벙했다. 아니, 내가 무슨 ‘학정’을 농단한 것도 아니고 이게 따귀씩이나 맞을 일인가. 그 연예인과 일곱 시간 동안 차에 누워서 프로포폴이나 졸피뎀을 투약받았다면 또 모르겠다. 쉬는 시간에 겨우 사인을 받은 것뿐이다. 그래도 화가 풀리지 않았는지 선생님은 애써 받아온 사인지를 <제이티비시> 취재팀이 몽땅 달라붙어도 복원하기 힘들 정도로 박박 찢어버렸다. 무참했다. “이렇듯 원칙 없고 무분별한 체벌로 인해 언젠가 교권은 땅에 떨어질 겁니다”, 라는 말을 당시에 한 건 아니지만 그때의 응어리만큼은 지금까지도 남아 있다. 내가 사인을 받는 일에 적극적이지 않은 이유가 100퍼센트 그 일 때문이라고 할 순 없어도 어느 정도 영향을 끼쳤을 것 같다. 그건 그렇고 멋진 필체로 사인을 해준 조금산씨에게는 이제라도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아이들에게 전해 들은 것과 달리 그는 귀찮아하지 않았다. 역시 사람은 직접 겪어보기 전엔 모르는 법이다.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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