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7.01.18 19:40 수정 : 2017.01.18 20:46

영화 <타짜>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액땜’이란 자족적 위로로 분통을 삭여야 하는 ‘뜻밖의’ 사건들

영화 <타짜>의 한 장면. <한겨레> 자료사진
작년에는 외국에 나갈 일이 꽤 많았다. 봄에는 프랑스, 여름에는 캐나다와 일본, 가을에는 베트남, 겨울에는 다시 일본. 명목상으로는 출판사 업무와 관련 있는 출장이었다. 하지만 ‘여기까지 왔는데 일만 하다가 돌아갈 순 없지’ 싶어서 이를 악물고 열심히 놀았다. 한데 이제 와서 돌이켜보니 뭘 하고 놀았는지 떠오르지 않는다. 이래서 사람들이 여행을 가면 “남는 건 사진뿐”이라고 하나 보다. 흥미로운 건 뜻밖의 사건사고는 확실하게 기억한다는 거다. 이것은 ‘뜻밖의’라는 대목이 발산하는 강렬함 때문일 거라고 짐작하는데 나만 그렇게 느끼는 건지도 모르겠다.

지난 몇 차례의 외국여행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충고 가운데 하나는 ‘소매치기를 조심하라’는 것이었다. 프랑스에서도 캐나다에서도 베트남에서도 가이드에게 그런 말을 들었다. 의례적인 충고가 아니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입을 모아 몇 번에 걸쳐서 주의를 주었다. 별일이야 있겠느냐며 마음 쓰지 않던 나도 이동할 때마다 지갑을 손으로 만져 확인했을 정도다. 잔액도 늘 체크해두었다. 그러나 선현들께서 이르지 않았던가. 한 명의 도둑을 열 사람이 막지 못한다고. 마음먹고 덤비는 인간에게는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법이다.

캐나다는 내가 몸담은 출판사의 독자 교정 행사 때문에 갔다. 열하루 일정이었다. 그중 교정을 보는 데는 반나절이 걸렸다. 나머지는 노는 데 썼다. 캠벨리버에서 경비행기를 타고 날아가면 나오는 세일콘에서 주로 시간을 보냈다. 전화는 아예 터지지 않고 와이파이도 운이 좋아야 겨우 잡히는 오지인데 벌목산업이 퇴락한 이후 몇몇 가구가 펜션을 운영하며 먹고사는 곳이다. 이 펜션들은 잠만 재워주는 게 아니라 오지의 특성을 십분 활용하여 ‘<쥬라기 공원>에 필적할 만한 자연친화적 어드벤처’를 제공함으로써 전세계 관광객들을 불러 모은다.

그렇다면 대관절 그 어드벤처란 무엇이냐. 그리즐리베어를 코앞에서 구경시켜주는 것이다. 동물원 철창 같은 데 가둬놓고 들이미는 게 아니라 숲에서 노닐고 있는 곰과 맞닥뜨리게 해준다. 참고로 그리즐리는 ‘공포스럽다’는 뜻의 형용사 ‘grisly’에서 유래한 이름이라고 한다. 그딴 위험한 걸 왜 돈까지 줘가며 목도하려 했는가는 묻지 마시라. 설명할 방법이 없으니까. 그렇잖아도 오지마을인 곳에서 산속으로 한참을 더 들어가 꼬박 하루를 기다린 끝에 그것과 마주한 순간 내 머릿속에서는 ‘아아 이것이야말로 재주는 곰이 넘고 돈은 딴 놈이 벌어간다는 속담철학적 지혜를 몸소 실천하고 있는 관광사업의 현장이로구나’ 하고 솔직히 감탄했다. 일생에 한 번쯤은 해볼 만한 경험이다.

50달러 지폐를 받은 택시기사가
5달러짜리라고 우기며 버텼다
치미는 분노 속 터져나온 말은
고작 “유 아 라이어”

사건은 밴쿠버에서 벌어졌다. 독자 교정 행사 마지막 날, 우리 일행은 각자 알아서 하루를 보내기로 했다. 안 그래도 시간이 나면 들러볼까 싶은 곳이 있었다. 로마의 콜로세움을 본떠 만들었다는 밴쿠버 공립도서관이다. 1869년에 문을 연 이곳은 열람의 편의성과 디지털 자료 보유 현황, 방문객들의 활용도 측면에서 세계 최고의 공공도서관으로 평가받은 곳이기도 하다. 마침 우리가 묵던 민박집에서 멀지 않았다. 나는 택시를 탔다. 요금은 10달러가 조금 넘었던 걸로 기억한다. 팁까지 고려해서 넉넉하게 50달러짜리 지폐를 건네주었다. 택시기사가 마술사 후디니와도 좋은 승부가 될 만한 행각을 벌인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뒤에 앉아 있던 나에게 지폐를 받기 위해 몸을 틀었다가 원위치하는 찰나에 기사는 난데없이 재채기를 했다. 그러고는 ‘응? 이상한데?’ 하는 느낌으로 다시 지폐를 보여주었다. 나도 ‘왜? 뭐가 이상한데?’ 하는 표정으로 운전기사의 손에 들린 지폐를 쳐다보았다. 그것은 5달러짜리였다. 이를 한국적 상황에 맞게 각색하면 다음과 같다. 미터기 요금이 1만2천원임을 확인한 손님이 5만원짜리 지폐를 건넨다. 뒤쪽으로 몸을 틀었던 기사가 하필 왼손으로 돈을 받자마자 거스름돈을 꺼내려다가 재채기를 한다. 순간 멈칫. 그러고는 지폐를 다시 보여주며 이렇게 말한다. “손님, 뭔가 착각하셨나 봅니다. 5만원이 아니라 5천원을 주셨네요.”

하지만 나는 단언할 수 있다. 당시 내 수중에는 50달러 지폐 두 장이 전부였기 때문이다. 한국과 달리 이곳에서는 택시를 이용할 때도 팁을 줘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잔돈을 미리 바꿔서 탈까 고민하다가 팁 계산이 귀찮아서 ‘몰라몰라, 50달러 내면 알아서 거슬러 주겠지’ 방심했는데 이런 일이 벌어지고 말았다. 각 나라의 관광지에서 대물림하는 수법인지 모르겠지만 똑같은 일을 터키에서도 겪은 바 있다. 사기다. 문제는 그걸 표현할 방법이 없었다는 거다. 내 외국어는 박근혜 대통령의 한국어 실력과 비슷한 수준이다. 택시기사는 시비조로 무슨 얘기인가를 지껄였다. “나 바빠, 얼른 돈 내고 내려”라는 뜻인 듯했다.

나는 분노 섞인 호흡을 가다듬으며 잠시 그를 노려보았다. 눈싸움이 이어졌다. 그때 내 입에서 튀어나온 영어는 정확히 이랬다. “유 아 라이어(You are liar).” 머릿속으로는 “뭐여, 밑장빼기여? 내가 빙다리 핫바지로 보이냐? 어디서 약을 팔아. 내가 50달러 냈다는 데 내 돈 모두하고 내 손모가지를 건다. 쫄리면 뒈지시던지” 같은 대사를 유장하게 읊조렸지만 내가 표현할 수 있는 건 고작해야 “당신은 거짓말쟁이로군요”였다. 상황은 우리 뒤에 정차하고 있던 다른 택시기사의 중재로 종료되었다. 거짓말쟁이 기사는 반성하는 기색 없이 툴툴대다가 택시를 몰고 유유히 떠나갔다. “재수가 없으려니, 원”이라는 말을 남기고.

덕분에 여행의 마무리가 우중충했지만 비행기를 타고 돌아오는 동안 “괜찮아, 액땜한 셈 치고 또 열심히 벌자”고 마음먹었다. 그런데 액땜이란 건 해가 바뀌면 효력이 사라지는 건지 새해 첫날부터 된통 당하고 말았다. 도매상 송인서적 얘기다. 북스피어의 피해액은 1억하고 100만원쯤 된다. 돌려받을 길은 막막하다. 어쩌랴. 도리 없이 “괜찮아, 액땜한 셈 치고 또 열심히 벌자”고 마음먹을 수밖에. 하지만 한마디 정도는 해두고 싶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부도 전날까지 이렇다 할 내색 없이 출판사로 책을 왕창 주문해서 가져간 건 너무한 것 아닙니까. 저를 빙다리 핫바지로 보지 않고서야…….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