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2.15 19:39
수정 : 2017.02.15 2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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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의 도미니카넌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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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불발된 스페인 여행 대신 간 곳에서 얻은 어떤 영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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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덜란드 마스트리흐트의 도미니카넌 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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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인 여행에 관한 이야기를 들은 것은 작년 초겨울이었다. 평소에 교류가 잦았던 건 아니지만 책을 만들어 먹고산다는 인연으로 모인 다섯 편집자들이 맥주를 마시던 자리였다. 그중 한명이 안달루시아에 관해 이러쿵저러쿵 떠들기 시작했을 때만 해도 아무런 계획이 없었다. 그래, 헤밍웨이가 “사랑하는 사람과 로맨틱한 시간을 보내기 좋은 곳”이라고 했다는 론다도 카잔차키스가 “들어갈 때 전율을 느꼈다”던 알람브라도 실제로 보면 꽤나 근사하겠지. 그런 정도였다. 가면 좋겠지만 당장은 어쩔 수 없이 소설 혹은 영화 속에서나 감상할 수 있는 곳. 그러다가 술잔이 서너 순배쯤 돌고 어지간히 불콰해지자 누군가 “그럼, 요 멤버로 같이 다녀오면 어때요” 하고 대뜸 물었던 것이다. 설 연휴에 휴가를 이어붙이면 괜찮지 않겠느냐면서. 이런 거, 다들 한 번쯤 겪어보셨을 줄 안다. 술자리에서 별안간 여행계획이 세워지고 왁자지껄 분위기가 무르익어가지만 다음날 해가 뜨면 서로 머리를 긁적이며 멋쩍게 웃고 말아버리는 경우 말이다.
하지만 술자리 발언을 진지하게 추구하는 인간이 좌중에 속해 있다면 이야기는 사뭇 달라진다. 이튿날 도착한 메일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적혀 있었다. “어제는 잘 들어가셨지요? 스페인 여행을 기대하며 잠도 짧게 자고 사무실에 나와 항공권 검색을 해봤습니다. 현재 가장 저렴하게 나온 상품을 아래에 적어둡니다. 이와 상관없이 먼저 100만원씩 송금해주시면 좋을 것 같아요.” 항공사별로 비교해놓은 금액을 마주하며 나는 살짝 웃었다. 이 사람, 추진력 하나는 정말이지 발군이구나. 편집 기획도 이렇듯 과감하니까 좋은 책을 만들 수 있는 거겠지. 그래도 에이, 설마 하는 마음이었는데 이어서 도착한 메일은 그냥 웃고 넘길 수 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스페인에 머무는 동안 음식과 문화에 홀딱 반한 소설가 천운영씨가 연남동에 스페인 전문식당을 준비 중인데 마침 기회가 닿아 우리에게 전문가적 가이드를 해줄 수 있다는 것이다. 순식간에 여행은 기정사실이 됐고 어, 어 하는 사이에 항공권 예약도 완료되었다. 이럴 때 스페인에서는 ‘케 세라 세라’(될 대로 되라)라는 말을 쓰지 않으려나.
술자리에서 한 스페인 얘기가
진짜 여행으로 실행되기 직전
‘송인’ 부도에 취소된 계획
그때 ‘서점 기행’ 제안이 왔다
본격적인 여행 준비를 위한 모임 장소가 ‘라 메사 델 키호테’(돈키호테의 식탁. 천운영씨의 식당)로 정해졌을 즈음 나는 출연하는 라디오의 한달치 책 소개 분량을 미리 녹음하고 이런저런 강의 일정도 조정해둔 상태였다. 심지어 칼럼도 앞당겨 썼다. 틈틈이 카잔차키스의 <스페인 기행>도 읽었다. 그러나 엿장수가 아닌 이상 늘 뜻하지 않은 곳에서 복병과 조우하는 것이 인생 아니던가. 도매상 송인서적의 부도 소식이 알려진 건 모임 전날이었다. 함께 여행을 떠나려던 편집자들이 몸담은 출판사가 크고 작은 피해를 입었다. 게다가 일이 안 되려고 그랬는지 한명은 세그웨이인가 뭔가를 타고 까불다가 팔이 부러졌다. 송인의 직격탄을 맞은 이가 “음, 저는 아무래도 빠져야 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을 때 팔이 부러진 이도 어렵겠다는 뜻을 전했다.
남은 세 사람이 모여서 “이 판국에 스페인은 무슨 얼어죽을, 출판사나 잘 건사하자”며 술잔을 기울이던 자리에 여행사 대표가 동석했던 건 우연이다. 우리가 스페인에 가려던 딱 그 시기에 그는 여행 프로그램 개발을 위한 답사를 갈 요량이라고 했다. 별생각 없이 “무슨 프로그램인데요?”라고 물었을 때 돌아온 대답은 좀 뜻밖이었다. “유럽 책방 기행인데요.” 유럽의 미술관과 박물관을 돌아보는 단체 프로그램을 오랫동안 운영하다가 문득 서점을 둘러보는 코스를 만들어보면 어떨까 생각했다고 한다. 독일의 ‘마이어셰 서점’과 네덜란드의 ‘도미니카넌 서점’, 벨기에의 ‘트로피슴 서점’과 영국 런던의 ‘돈트 북스’, 옥스퍼드의 ‘블랙웰’, 책마을 ‘헤이온와이’를 들르는 일정이란다. 그는 삼합을 씹으며 “그런데 사람들이 좋아할지(우물우물), 여행사에서 이런 프로그램을 만들면(우물우물), 신청할까요?” 하고 물었다. 마이어셰 서점은 처음 듣지만 도미니카넌 서점과 트로피슴 서점은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서점으로 <비비시>(BBC)에 소개되면서 오로지 서점을 보려고 해당 국가에 가기도 한다는 곳 아닌가. 사람들이 좋아할지 안 좋아할지는 알 수 없지만 당장 내가 가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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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국 런던의 돈트 북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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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은 요 멤버로 같이 다녀오면 어때요”라는 문자가 온 건 다음날이었다. 어차피 일정은 빼두었고 경비도 비슷하니 추진해보자는 얘기였다. 여행사의 젊은 사장 처지에서도 직접 책을 만들어 파는 이들이 동행하면 좋겠다고 했단다. 본인 회사에서 확보한 항공권이 있고 직거래하는 호텔을 통해 숙박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설명이 뒤따랐다. 그때 내가 했던 고민은 이런 것이었다. 송인 부도로 출판사가 어렵다느니 대출을 받았다느니 하고 징징거렸던 내가 유럽 여행씩이나 가면 동종업계 종사자들과 독자들이 과연 어떻게 쳐다볼까. 곱게 보진 않겠지. 아직 먹고살 만한 모양이라고 비아냥거릴 수도 있고. 하지만 열흘에 걸쳐 유럽의 서점들, 위에서 거론한 곳을 포함하여 길거리에서 우연히 마주친 고서점과 동네서점을 돌아보고 이 글을 쓰는 지금은 다녀오길 백번 잘했다고 생각한다. 적잖은 비용이 들었지만 그만큼 내가 원하는 책을 만들기 위해 필요한 영감과 그 책을 매개로 독자들과 즐겁게 노는 데 도움이 될 이벤트 아이디어를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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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더블린의 트리니티 칼리지 라이브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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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각의 서점에 대한 단상을 여기에 읊조리기에는 지면이 모자라니까 그건 다음에 기회가 생기면 써보도록 하겠다. 다만 지금 막 떠오른 이벤트 아이디어에 대해서 하나쯤 자문을 구해보고 싶다. ‘특색 있는 서점’+‘장르문학 관련 유적지’를 탐방하는 열흘간의 유럽 여행 프로그램을 출판사에서 만들면 독자들이 좋아할까. 예를 들어 아침에는 런던의 여행전문 스탠퍼드 서점을 구경하고 오후에는 베이커가에 있는 셜록 홈스 박물관을 둘러보는 식으로 말이지. 투어 중간에 북스피어에서 출간한 소설의 저자를 만나거나 소설 속 장소를 구경할 수도 있겠고. 대략 올가을쯤 진행해볼 요량이다. 비용이 만만치는 않겠지만 분명 재미있을 테니 어디까지나 ‘케 세라 세라’적인 심정으로 호응해주시면 고맙겠다.
글·사진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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