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3.01 19:31
수정 : 2017.03.01 19: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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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 야구를 함께 하는 동료. 김홍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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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마포 김사장의 찌질한 사생활
스피드건에게조차 미안해하던 투수가 ‘5이닝 3실점’으로 거듭나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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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인 야구를 함께 하는 동료. 김홍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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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야구클래식(WBC) 한국대표팀 뉴스를 보다가 떠올렸다. 내가 처음 글러브를 끼고 공은 던진 건 초등학교 때였다. 지금도 그러리라 짐작하는데, 당시에도 각 구단이 적극적으로 어린이 회원을 모집했다. 가입비 오천원을 내면 구단의 로고가 박힌 점퍼와 가방과 사인볼 등을 챙겨줬다. 내 또래 아이들은 모두 그거 안 하면 큰일나는 분위기였다. 나도 아버지를 졸라 엠비시(MBC) 청룡 회원으로 가입했다. 자신이 가입한 야구팀의 점퍼를 입고 편을 나누어 치고 달리다가 툭하면 싸우던 기억이 새록새록하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야구가 시들해졌다. 몸에 달라붙는 유니폼이 우스꽝스러워 보였고 공격하는 선수들이 벤치에 앉아 있는 정적인 분위기도 별로였다. 중계를 볼 때 불쑥불쑥 등장하는 광고도 마땅치 않았다.
다시 야구에 관심을 가지게 된 건 우연히 아다치 미쓰루의 만화 <에이치(H)2>를 보고 나서였다. “야구라는 건 말이죠-” 하고 주인공 히로가 말한다. “점수 차가 벌어졌어도 스리 아웃을 잡기 전엔 끝나지 않거든요. 타임아웃이 없는 시합의 묘미를 가르쳐 드리지요.” 그것은 나에게 있어서 일종의 전조였다. 아니, 나뿐 아니라 다들 그랬던 게 아닐까. 감사용이라는 야구선수에 관한 영화를 보다가, 류현진 선수가 메이저리그에서 역투하는 경기를 관전하다가, 계기는 다르지만 많은 이들이 어린 시절에 했던 ‘공놀이’를 다시금 해보고 싶다는 마음이 들지 않았을까. 그래서 누군가가 진짜로 야구를 해보자고 넌지시 얘기를 꺼냈을 때 서로서로 독려하며 두말없이 승낙했던 게 아닐까.
전국적으로 사회인 야구 동호인이 20만명을 넘어설 즈음, 나도 사회인 야구팀에 가입했다. 나이는 서른 초반에서 마흔 후반으로 가수, 탤런트, 식당 주인, 편집자 등 다양한 직업을 가진 사람들이 스무명쯤 모였다. 우리는 겨울 내내 주말마다 만나서 다가올 시즌에 대비한 훈련에 임했다. 훈련이라고 해봐야 방학 중인 중학교 운동장에서 캐치볼이나 펑고(방망이로 공을 치는 것)를 하는 정도였다. 연습경기는 경기도 남양주 어디쯤에 있는, 못 쓰는 공터를 개조한 사설 운동장을 겨우 빌려서 했다. 두세명을 제외하면 수준은, 이렇게 표현하는 게 어떨지 모르겠지만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누군가 실수를 해도 다들 씩 웃고 넘어가는 분위기였다. 우리는 아마추어니까.
시즌이 시작되기 전, 우리 팀은 4부 리그(선수 출신이 없는 아마추어 동호인 리그)에 가입했다. 가입비 300만원은 팀원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았다. 거기에 팀 운영에 필요한 회비며 각종 장비를 구입하느라 들어간 비용은 만만치 않았다. 경기는 2주에 한 번꼴로 주말에 잡혔다. 경기장과 심판이 배정되고 기록과 승패도 꽤 엄격하게 관리되기 때문에 연습 때와 달리 모두들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재미로 시작한 사회인 야구
패배가 거듭되자 자존심 상했다
돈 주고 간 연습실에서 땀 흘린 3개월
그걸 잊지 않으면 좋겠는데…
내 보직은 투수였다. 좌완. 내가 “사회인 야구팀에서 야구를 합니다, 투수예요”라고 얘기하면 대개 사람들은 “오! 정말? 얼마나 빨리 던지는데?”라고 묻는다. 얼마나 빨리 던지느냐. 형편없다. 스피드 건에 미안할 정도다. 그렇다면 컨트롤이 좋은가. 우리 팀 포수 글러브가 아니라 상대팀 타자 몸에 맞는 볼이 회당 한두개쯤 나온다. 그래도 초반에는 다들 어깨를 두드리며 격려해주었다. 이기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모여서 야구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좋았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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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사회인 야구팀 동료들. 첫줄 왼쪽에서 다섯째가 김홍민 대표. 김홍민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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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시즌이 중반에 접어들고 무더운 날씨가 이어지자 분위기가 미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전에는 웃어넘기거나 격려로 덮었던 실수를, 투덜거리며 다그치거나 나무라는 일이 빈번해졌다. 나도 3회까지 아홉점이나 얻어맞고 싫은 소리를 들은 적이 있다. 외야에서 비아냥거림이 날아왔을 때는, 대놓고 따지진 않았지만 솔직히 기분이 좋지 않았다. 내가 이러려고 사회인 야구를 했나 싶어서 자괴감이 들 정도였다. 당연히 자존심도 상했다. 그길로 인터넷을 검색하여 전직 프로야구 선수가 맨투맨으로 지도해 준다는 야구 연습실을 찾았다. 경기도 일산의 어느 건물 지하실을 개조하여 투타에 필요한 장비를 갖추어 놓고 10만원만 내면 한 달 동안 어떻게 효과적으로 공을 던지고 칠 수 있는지를 가르쳐 준다고 했다.
이런 델 오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싶었는데 웬걸, 막상 가보니 서울에서 꽃집을 운영한다는 형제님과 부천에서 아이들을 가르친다는 자매님 등 상당히 많은 사회인 야구팀 소속 선수들이 퇴근하자마자 달려와 야구를 배우고 있었다. 그들 틈에 끼어서 나도 매주 어깨가 부서져라 공을 던졌다. 아니, 그러다가는 몸이 상한다는 친절한 충고에 따라 허리와 손목 쓰는 법을 익혔다. 기초부터 차근차근 폼을 바로잡아 나갔다. 기본기가 형편 무인지경이다 보니 약간의 코치만 받아도 실력이 느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그사이에도 아침마다 수영장에 가는 걸 빼먹지 않았다. 수영은 뭉친 근육을 풀어주는 데 유효했다.
그렇게 3개월을 보내고 다시 팀으로 돌아가서 처음 등판한 그날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5이닝을 던지는 동안 단 석점만 내주었다. 사사구도 눈에 띄게 줄었고 무엇보다 이닝을 길게 끌지 않았다. 나는 동료들의 박수를 받으며 완투할 수 있었다. 흡사 야구영화 같은 장면이 나에게도 찾아오는구나. 짜릿한 순간이었다.
하지만 아무에게도 “실은 말이지, 전직 야구 선수한테 한 달에 10만원씩 내고 몇 개월간 배우러 다녔어”라고 털어놓지 않았다. 장차 야구 꿈나무가 될 것도 아닌 마당에 뭘 그렇게까지 했냐고 누군가 물어보면 대답할 말이 궁했기 때문이다. 시즌이 끝난 후에는 글 쓰고 책 만드는 일로 바빠져서 야구도 그만두게 되었다. 다만 그해 여름, 일산의 어느 건물 지하에서 땀을 뻘뻘 흘린 후에 절실하게 느꼈던 깨달음만큼은 여전히 잘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인정받고 싶으면 그에 어울리는 노력, 즉 시간과 비용을 들여야 한다는 평범하기 이를 데 없는 사실이었다. 지나치게 평범한 결론이어서 송구하지만 “베란다 구석에 처박아둔 채 물도 주지 않는 화분에서 아름다운 꽃이 피어나기를 바라”는 심보를 가진, 감당하기 어려운 유형의 인간들을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도하고 있지 않은가. 영문을 알 수 없는 벽에 맞닥뜨리면 배우고 훈련함으로써 헤쳐 나갈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조그마한 야구 연습장에서 체험했다. 훗날 나이가 들어도 잊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어떨지.
김홍민 북스피어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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