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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7.27 19:08 수정 : 2016.07.27 19:14

[매거진 esc] 김보통의 노잼, 노스트레스

김보통
레코드 가게라는 것이 있었다. 지금도 있긴 있지만, 내가 알던 대부분의 레코드 가게는 사라졌으니까 ‘있었다’라고 표현해도 괜찮을 것 같다.

그곳에선 당연히 레코드를 팔았다. 레코드가 얼마나 보편적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 집엔 턴테이블이 없었고, 레코드에 대한 기억도 없다. 그럼에도 레코드 가게에 대한 기억은 몇 남아 있다. 가장 최근의 기억은 16년 전의 일이다.

스무살로 넘어가던 겨울 무렵이었다. 당시 수능시험을 보란듯이 망치고, 이름을 아는 모든 대학엔 갈 수 없다는 결과를 참담하지만, 홀가분하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홀가분한 방식이란, 아침에 집을 나와 버스 정거장에서 아무 버스나 잡아타고 종점에서 내려 해가 질 때까지 걸어다니다 다시 그 버스를 잡아타고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었다.

왕복 버스비를 제외하곤 돈이 없었기 때문에 뭘 사 먹거나 하진 못했다. 아직 어리고, 일을 하지 않던 나이라 돈이 없었던 것도 있지만, 부모님도 돈이 없었다. 기억나는 대부분의 과거 속에서 돈이 없었다. 원죄 같은 가난이었다. 돈이 좀 있어 봤어야 없을 때의 괴로움을 알 텐데, 늘 없었기 때문에 괴로움도 딱히 몰랐다. 그래서, 종일 굶으며 걷기만 했어도 힘들지 않았다.

많은 길을 걸었다. 많은 골목을 지나쳤고, 많은 약수터를 올랐으며, 많은 레코드 가게를 지나쳤다. 가게에는 레코드판보다 시디(CD)가 더 많아, 시디 가게라고 불러도 될 법한 모습이었다. 당시는 시디와 시디플레이어(라는 것이 있었다!)가 전성기였던 시절로, 반 친구들은 졸업 겸 대학 입학 선물로 소니나 산요 시디플레이어를 받곤 했다.

당연히 나는 갖고 있지 않았다. 딱 한 번, 하루 종일 손님 한 명 오지 않는 텅 빈 방앗간에서 멍하니 텔레비전만 보고 있던 아버지가 “졸업하는데, 너도 시디플레이어 사줄까?”라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가게는 문만 열어놨다뿐이지 폐업 상태였고, 유일한 수입원은 어머니가 근처 속옷 공장에서 팬티 실밥 하나 뜯으면 십원씩 쳐 하루 몇천원을 버는 것이 전부였던 때였다.

“아니. 괜찮아, 시디도 없는데 뭐.” 아버지는 시무룩한 표정으로 텔레비전만 보셨다.

어찌 됐든, 많은 레코드 가게를 지나쳤다. 가끔은 들어가기도 했는데, 그럴 때면 마치 시디플레이어 하나쯤 가지고 있는 사람처럼 이 시디, 저 시디 뒤적거리며 살 것처럼 구경을 하곤 했다. ‘퀸’도, ‘레드제플린’도, ‘어스 윈드 앤 파이어’도 노래는 들어본 적 없었지만, 익히 들어 잘 알고 있는 것처럼 구경하곤 했다.

매번 구경만 했던 것은 아니다. 딱 한 번, 레코드 가게 사장이 직접 선곡해 만든 불법 복제 테이프를 산 적이 있었다. ‘레드 핫 칠리 페퍼스’의 베스트 노래 모음이었다. 사려고 마음먹었던 것은 아닌데, 만지작만지작하며 구경만 하던 내게 사장이 “음악 좋아하면 이거 한번~ (사봐)” 하는 식으로 슬쩍 떠본 것에 넘어갔다. 그때가 서울 양천구 어딘가를 걷던 날이었다. 이름은 들어본 적이 없지만 어쨌든 어딘가 갈 수 있는 대학이 있다는 소식을 들었던 즈음이기도 했다.

그날은 약수터에 앉아 짝사랑하던 친구에게 편지를 썼던 기억이 난다. 보내지 못할 편지를 불법 복제 테이프와 함께 가방에 넣고 버스에 앉아 해가 지는 것을 바라보다가 문득 집에 카세트플레이어도 없다는 것이 떠올랐다.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처음부터 그 친구를 좋아하려던 건 아니었으니까, ‘레드 핫 칠리 페퍼스’를 좋아하려던 건 아니었으니까.

김보통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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