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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1.09 19:28 수정 : 2016.11.09 19:44

[ESC] 김보통의 노잼, 노스트레스

김보통
한때, 이발소의 시대가 있었다. ‘시대'라고 말해 거창한 것 같지만, ‘남자들은 보통 이발소를 가는 거지'라는 인식이 보편적이었던 때를 말한다. 지금이야 미용실에서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중년의 아저씨들도 심심치 않게 보여 ‘무슨 시대착오적 발상인가’ 싶지만, 이십여년 전만 하더라도 미용실 앞 길바닥에 주저앉아 “나는 남잔데 왜 미용실을 가느냐!”며 고래고래 악을 쓰고 울던 아이들이 있었다. 나도 그런 아이였다.

그때는 그랬다. 어릴 적 나에게 미용실은 ‘여자가 가는 곳’, 이발소는 ‘남자가 가는 곳’이었다. 그런 확고한 신념이 있음에도 미용실에 끌려다녀야 했다. 집 앞 길 건너에서 사촌누나가 미용실을 운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보통 그렇게 끌려가는 날엔 어머니도 파마를 했다. 덕분에 몇 시간씩 기다리노라면 파마약 냄새에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곤욕스러운 것은 학교 여학우를 만날 때였다. 난처하기로는 목욕탕에서 짝꿍을 만나는 것보다 덜했지만 어색함은 그 몇 배였다. 머리를 깎는 중에 평소 애틋한 마음을 홀로 키워오던 친구가 드르륵 문을 열고 들어오면 인사를 할 수도, 벌떡 일어나 도망칠 수도 없었다. 몇십분 동안 눈길만 힐끔거리며 ‘위이잉~위이잉~’ 머리카락 잘리는 소리를 듣고 앉아 있어야 했다. 다음날 학교에서 “나, 너 어제 미용실에서 봤다” 하고 말이라도 걸어줘 내심 좋았지만 곤욕스러운 건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형제 이발소’를 좋아했다. 의사처럼 하얀 가운을 입은 주인 아저씨는 눈썹이 짙고 콧구멍이 거대했으며, 면도를 안 한 건지 못 한 건지 언제나 수염이 거뭇거뭇했다. 그 모습을 보며 당시 내가 알던 몇 안 되던 속담 중 하나인 ‘중이 제 머리 못 깎는다’를 떠올렸다. ‘역시 실력 있는 이발사…’라고 혼자 생각했었다.

아직 어려 키가 작던 나는 이발소 의자 위에 널빤지를 하나 더 올려놓고 앉아야만 했다. 그게 좋았다. 곡예사가 된 듯한 기분이었다. 훌쩍 높아진 위치에 앉아 거울을 바라보면 금세 어른이 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주인 아저씨는 말이 없었다. 이제 갓 초등학교에 들어간 꼬맹이와 할 말도 없었을 것이다. 아저씨는 시종일관 내 머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바리캉’(전동식이 아니었다)으로 머리를 자를 뿐이었다. 가끔 바리캉에 머리카락이 씹혀 “악!” 하고 비명을 질러도 전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무심히, 그리고 진중하게 바리캉을 ‘찌걱찌걱’ 움직였다.

내가 가장 좋아하던 순간은 이발이 끝난 뒤 곱게 낸 거품을 귀밑과 목 등에 묻힌 뒤 면도를 해주는 것이었다. ‘사아악, 삭’ 하는 기분 좋은 소리와 함께 칼날이 오갈 때마다 말끔히 사라지는 비누거품을 바라보면 몇 안 되던 내 근심도 사라지는 것 같았다.

머리를 감겨주는 시스템은 미용실의 것이 더 나았다. 당시에도 드물진 않던 샤워기 대신 가게 한쪽에 놓인, 난로에 데운 물을 플라스틱 물뿌리개에 담아 찬물과 섞어 머리에 뿌려주었다. 지난 식목일 학교 화단에 심었던 봉선화가 이런 기분이었을까. 이어 아저씨는 더없이 터프하게 수건으로 머리를 털어주었다. 왜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아저씨들은 이렇게나 과격하게 아이들의 물기를 제거한 것일까. 너무 귀찮아 한시라도 빨리 끝내려는 것이 아닐까 싶지만, 본인들의 머리를 털 때도 폭력적이었던 점을 본다면 중년 남성의 특성이 아닐까 싶다.

많은 시간이 흘렀으나 사라지지 않는 의문은 종업원도 없이 머리를 깎고, 거품을 내 면도를 해주고, 계산을 한 뒤 바닥을 쓸고, 다음 손님을 앉히는 그 모든 것을 혼자 했음에도 이름이 왜 ‘형제 이발소’인가 하는 것이다. 내 차례를 기다리는 동안 너덜너덜한 성인잡지를 뒤적이며 생각해보곤 했었는데, 끝내 알아내지 못했다.

글·그림 김보통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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