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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2.07 19:48 수정 : 2016.12.07 20:27

[ESC] 김보통의 노잼, 노스트레스

김보통
스물한두살 때의 일이다.

아버지는 내게 “넌 머리통이 커서 권투는 절대 못해”라고 말씀하셨다. 어떤 상황이었는진 모르겠다. 텔레비전으로 권투 중계를 보고 있었거나 그랬을 것이다. 나는 그길로 집을 나서 지하철역 근처 권투 체육관에 등록했다.

이유는 모른다. 반항심 같은 것이 조금 있었을지도 모르고, 막연히 권투라는 운동을 동경했던 것일 수도 있다. 정확히는 모른다. 나는 어떤 행동을 함에 있어 자신을 이해하려는 노력을 거의 하지 않고 살았다.

체육관은 대부분 혼자였다. 점심에 가든 저녁에 가든 아무도 없었다. 관장님이 없는 날도 있었다. 그런 날이면 묵묵히 줄넘기만 한 시간씩 하곤 했다. 다른 사람들이 오는 시간대가 도대체 언제인가 싶었는데, 그냥 다니는 사람 자체가 별로 없었다.

“권투의 시대는 갔지.”

라면을 후후 불며 관장님이 말했다. 체육관 뒤쪽 작은 공간에 합판으로 얼기설기 지은 창고 같은 곳이었다. 소굴이랄까. 관장님은 그곳에서 머물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곤 했고 가끔 때가 맞으면 얻어먹을 수 있었다.

“요새는 뭐, 다이어트로 광고해야 사람 좀 오지. 누가 이런 거 하려고 해. 배고프고, 아프고.”

그렇게 말하며 라면을 ‘후후’ 부는 관장님의 모습 자체가 ‘이미 가버린 권투의 시대’를 상징하는 것 같았다. 믿을 순 없지만 과거 ‘동양 챔피언’이었다는 말 때문에 더더욱 그랬다. 관장님은 몹시 화려하게 녹이 슬고 찌그러진 트로피처럼 생겼었다.

훈련은 지루했고, 스파링은 괴로웠다. 도무지가 즐거움이란 것이 없는 운동이었다. 매일같이 자해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뛰고 달리고, 스파링을 하며 서로에게 타박상을 입히는 일이 반복될 뿐이었다. 심하게 얻어맞은 날은 관장님의 소굴 앞 계단에 앉아 울었다. “내가 이걸 왜 하고 있는 거지”라고 무심결에 말한 적도 있었다. 당연하지만, 나 자신의 행동을 이해하려 노력하지 않은 벌일 것이다.

“너. 대회 나가볼래?” 어느 날 관장님이 물었다. 긴장감이나 기대 같은 것은 전혀 없이 담백했다. “라면 먹고 갈래?”라고 묻는 것만큼이나 일상적이었다. 나는 답했다. “네. 나가보죠.”

그날부터 운동 시간이 배로 늘었다. 무엇보다 힘든 것은 로드워크였다. 로드워크는 위아래로 ‘추리닝’을 입고 그 위에 통풍이 안 되는 비닐운동복(이른바 땀복)을 뒤집어쓴 채 한 시간씩 뛰는 것이다. 사실 뛰는 거야 뛰다 보면 익숙해진다. 하지만 체육관 근방이 모두 번화가 및 유흥가인 탓에 번들거리는 운동복을 입고 땀을 철철 흘리며 사람들 사이를 헐떡이며 뛰어다니는 부끄러움은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았다. “코스가 너무 쪽팔려요. 근처 공원을 뛰면 안 될까요?” 하고 물으면, “안 돼. 홍보가 안 되잖아. 홍보가”라고 말했는데, 그것은 분명히 잘못된 홍보 전략이라고 지금도 생각하고 있다.

대회에 나간 나는 동메달을 땄다. 헤드기어를 했음에도 스파링 때와는 비교도 안 되게 부어오른 얼굴을 한 채 메달을 목에 걸고 집에 들어섰다. 나를 본 아버지는 “하하하” 하고 웃으셨다. 별말은 없었지만, 그 뒤로 돌아가실 때까지 다시는 “넌 ~해서 ~를 못한다”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랬다간 또 뛰어나가 슬그머니 해버릴까 걱정이 됐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제 와 고백하건대, 사실 동메달을 딴 것은 내가 잘해서는 아니었다. 나는 그때 첫 시합 1라운드 시작과 동시에 시원하게 케이오를 당했었다. 어떻게 동메달을 딴 것이냐 하면, 내 체급의 참가 선수가 셋뿐이었다. 어쩌다 보니 참가상이 된 셈이다.

물론, 시합 날엔 나를 아는 어느 누구도, 심지어 관장님조차 오지 않았기 때문에 이 사실은 이날 이때까지 비밀이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들도 비밀을 지켜주길 바란다. 부디.

김보통 만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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