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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9.01.10 18:27 수정 : 2019.01.10 19:19

‘공략하기보다 낙후시키기’ 전략이 나쁜 핵심 이유는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라는 점이다. ‘낙후’라는 단어부터가 이미 발화 주체의 우위를 전제하고 있다. ‘너의 후진성과 미개함’을 ‘세련되고 선진적인 내’가 판단한다는 식이다. 이런 태도는 역효과만 일으킬 공산이 크다.

박권일
사회비평가

“공략하기보다 낙후시켜라”라는 말이 있다. 상대방의 주장에 일일이 반박하기보다 그것을 ‘후져 보이게’ 만드는 것이 효과적이라는 것이다. 1990년대와 2000년대를 진보주의자 혹은 페미니스트로 통과한 이들이라면, 한번쯤 들어보았을 슬로건이다. 어떤 이는 깊이 공감해 책상머리에 붙여두기도 했으리라.

2019년인 지금도 저 슬로건을 신봉하는 이들은 여전히 많다. 극우주의, 가부장주의를 ‘촌스럽고 미개한’ 것으로 표지화하는 전략은 여전히 유효해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십수년 전보다 훨씬 회의적인 입장이 됐다. 특히 지금과 같은 ‘혐오의 시대’에 저 전략으로는 문제를 극복할 수 없다고 확신한다.

급진적 청년들이 그들만의 조직과 문화를 아직 갖고 있었고 시민사회와 지식인이 극우언론과의 강한 긴장을 형성하던 시기에는, 전위에 선 소수의 주장이 대중에게 끼치는 영향력이 상당히 컸다. 자칫 오해될 수 있기에 부연이 필요하다. 이는 대중이 소수의 주장을 이해하고 납득했다는 의미가 아니다. 그보다는, 이해시키고 납득하는 긴 과정을 강한 결속을 바탕으로 일거에 뛰어넘는 형태에 가까웠다. 요컨대 과거의 운동은 엘리트 중심의 ‘일점돌파’형 성격이 강했다.

뛰어난 사람들이 명료한 동기를 지니고 뜨겁게 헌신할 때, 실제로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 그렇게 하나둘 당면 의제를 돌파하다 보면 어떤 착시가 일어난다. 시대가 완연히 바뀐 것처럼 느껴지는 것이다. 1990년대 급진적 문화운동의 어떤 순간, 혹은 노무현 대통령의 당선을 보면서 많은 사람이 느꼈던 전율 같은 것들이 생생한 예다. 물론 그건 어떤 종류의 진보였다. 하지만 이후 10여년 동안 벌어진 일은 어땠는가?

‘그럼에도 역사는 진보한다’느니, ‘역사는 일직선이 아니라 나선형으로 발전한다’느니 하는 이야기를 늘어놓으려는 게 아니다. 지난 20년을 겸허히 직시하자는 것이다. 역사의 비가역적 변화를 선언하는 바로 그 순간에 우리는 역사의 후퇴에 직면할 수 있다는 것. 심지어 그것이 거대한 반동의 신호탄일 수 있다는 것.

‘공략하기보다 낙후시키기’ 전략이 나쁜 핵심 이유는 지나치게 엘리트주의적이라는 점이다. ‘낙후’라는 단어부터가 이미 발화 주체의 우위를 전제하고 있다. ‘너의 후진성과 미개함’을 ‘세련되고 선진적인 내’가 판단한다는 식이다. 이런 태도는 의도와 달리 역효과만 일으킬 공산이 크다. 지식인의 권위가 추락하고 이른바 ‘표현대중’이 여론을 주도하는 현재 미디어 환경에서 이 전략은 더욱 위험해진다. 도덕심리학자 조너선 하이트는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사람들이 트럼프에게 투표한 건 그가 삶을 나아지게 만들 거라 믿어서가 아니라 자신들을 인종주의자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펀치를 날렸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엇을 사랑하는가보다 무엇을 증오하는가에 따라 투표한다.”

다수파로서 소수파를 찍소리 못 하게 제압하는 경우, ‘낙후시키기’ 전략은 효과적일지 모른다. 그런데 지금 혐오는 거의 시대정신이라 해도 될 정도로 곳곳에 만연해 있다. 물론 대다수 ‘선량한 시민’은 혐오는 ‘일베충’이나 하는 짓이지 자기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태연히 내뱉는다.

“딱히 동성애를 ‘반대’하진 않지만 내 눈엔 안 보이면 좋겠어요.” “난민 추방은 시민 안전을 위한 당연한 조치 아닌가요?” “장애인 학생 한명을 위해 모든 학생이 휠체어 접근 가능한 강의실로 옮기는 건 불합리하다고 생각합니다.” “비정규직 10년 일했다고 정규직화하는 게 가당키나 한가요? 힘들게 시험 치고 입사한 정규직은 뭐가 되나요?”

그럼 어찌해야 할까. 우선 큰 틀에서 혐오담론의 생산자와 소비자를 구별해 대응할 필요가 있다. 혐오담론을 소비하는 사람은 다수지만, <한겨레> 보도 등으로 밝혀졌듯 혐오 프레임과 논리를 조직적으로 생산·유통하는 세력은 극히 일부다. 생산자가 누구인지 추적하고 밝혀내는 것만으로 혐오담론의 확산을 막아내는 데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있다.

혐오담론의 소비자, 즉 ‘우리 안의 일베’에 대해서는 장기적으로 대처해가는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대중은 ‘공략’할 대상도 ‘낙후’시킬 대상도 아니라는 것이다. ‘압축진보’는 없다. 더디지만 함께 더 나은 존재가 되어가는 것. 결국 그게 가장 빠른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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