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6.08.25 20:15 수정 : 2016.08.25 20:29

이송희일의 자니?

오래전, 어느 영화인 모임 술자리에서 어떤 감독이 내게 물었다. “언제부터 게이였어요?” 두어 번 인사 나눈 정도의 옅은 친분 사이. 대답 대신 이렇게 질문했다. “감독님은 언제부터 게이였어요?” 자기는 이성애자라며 당황하길래, 한마디 덧붙였다. “아, 그래요? 그럼 언제부터 이성애자였어요?”

호기심 가득했다가 금세 당황해하는 표정으로 바뀌는 데 필요한 건 간단한 질문 두 가지였다. 그것도 그가 했던 질문을 그대로 되돌려준 것뿐이다. 아마도 그 감독은 그런 식으로 성정체성과 유년의 성애적 서사를 질문받은 게 처음이었으리라. 이성애만이 규범적 성애로 고착되어 정상적인 것으로 신화화된 사회에서 이성애자들은 통상 자신의 성정체성에 대해 질문받지 않고 살아가는 탓이다. 반면 성소수자들은 존재를 드러내는 순간부터 유년의 일기장부터 심지어 성행위 체위까지 낱낱이 심문된다. 고해신부처럼 삶의 구석구석을 호기롭게 탐문한다. 그 감독처럼 악의 없이 그저 호기심에 던진 질문이라고 해도, 일상에서 매번 마주하는 그 반복의 질문들은 당사자 입장에선 사실 꽤 성가신 일이다. 불쾌한 순간들이다.

그래서 택한 전략이 나에게 오는 질문의 엉덩이를 걷어차 그대로 상대에게 돌려보내는 거였다. 당신은 언제부터 이성에 관심을 가졌나요? 이른바, 질문의 ‘미러링'쯤 되겠다. 하지만 이것도 잠시, 언젠가부터 사람들이 더 이상 내게 질문하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그나마 성소수자 지식이 사회화된 영향도 있겠지만, 그동안 영화감독으로서 얻은 손바닥만한 인지도와 내 나이가 중요한 이유였다. 말하자면, 더 이상 나를 만만하지 않게 여기게 된 것이다. 실은 그게 더 신산하다. 만만하지 않은 상대는 피하고, ‘만만한' 소수자들에게 던져지는 질문의 그 조변석개의 가치란 얼마나 시시한 것인가.

소수자에게 향해지는 질문들은 대개 권력이 행사되는 순간이다. 소수자들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들을 받음으로써 소수자, 혹은 이방인의 이름을 얻게 된다. 이때의 질문은 의문의 시작이 아니라, 타자화의 종결이다. 배제와 분할의 시작이다. 혹자는 차별이 아니라 차이에 대한 존중 차원에서 질문했을 뿐이라고 항변하겠지만, 평등에 기초한 차이란 자신의 사적 삶을 누군가에게 고해하거나 해명하지 않을 권리, 그 침묵의 거리감에 의해 원초적으로 규정된다. 좋은 말로 해서 질문이지, 실상은 오지랖이고 간섭이다.

정상성과 규범에 강박된 사회일수록 경계 밖 소수자들에게 향해지는 정체성 질문들이 더욱 유난스러울 수밖에 없다. 한국에서 유일하게 질문을 받지 않는 존재란 ‘안정적인 직장을 가진 한국 국적의 결혼한 비장애인 가부장 남성'이다. 유일한 삶의 재판정이라도 되는 듯, 이 궤도에서 이탈된 자들은 예외 없이 소환돼 존재의 양태에 대해 심문받는다. 당신의 체위는 뭐죠? 당신은 어느 나라에서 왔나요? 당신은 왜 미혼이죠? 당신은 페미니스트인가요? 이런 질문들을 통해 정상성은 다시 견고해지고, 차가운 동일성의 제국에서 소수자들은 변두리로 슬럼화된다.

맙소사, 그러고 보니 곧 추석이다. 누군가에게는 한가위 명절이겠지만, 누군가에는 전국민 오지랖 대잔치다. 가족 단위로 모여 동질성의 가치를 다시 공고히 다지는 시간이니만큼, 눈치나 예의 따위는 훌훌 집어던지고 허심탄회 온갖 질문과 오지랖을 떠는 민족 대축제. 미혼인 사람이나 미취업자, 명절 노동을 도맡은 여성들도 한숨이겠지만, 이미 사회적 타자로 주변화된 소수자들이 받는 스트레스 또한 살얼음판을 걷는 것처럼 위태롭다. 다른 것들을 향해 돌팔매질처럼 던져지는 질문들의 향연. 과연, 침묵 속에서 서로를 보듬는 눈빛을 교환하는 그런 조용한 추석은 언제쯤 맞이하려나.

이송희일 영화감독

광고

브랜드 링크

기획연재|이송희일의 자니?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