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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1.05 18:51 수정 : 2017.01.05 20:23

이송희일의 자니?

“삼촌은 왜 애 안 낳아? 지금 얼마나 인구문제가 심각한데 출산을 안 해?”

얼마 전 초등학교 4학년 조카가 이렇게 따져 물었다. 학교에서 선생님이 가르쳐줬단다. 맙소사, 11살 여자 조카가 중년의 미혼 삼촌에게 시민의 출산 의무를 또박또박 고지하는 모습이라니, 어린 학생들에게까지 출산 의무를 훈육하는 전체주의적 풍경이라니. 그 순간, 조카에게 나는 불량시민이었다.

온갖 출산 슬로건이 깃발처럼 나부끼는 요즈음이다. 거의 모든 대중매체가 ‘인구 절벽'이 한국을 종말시킬 거라는 묵시론을 읊어대고 있다. 정부에선 출산 정책과 광고들을 하루가 멀다 하고 스팸처럼 쏟아낸다. 보건복지부는 아예 낙태시술을 처벌하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하지만 저출산과고령화, 이 두 키워드만을 앞세워 출산을 닦달하는 기세가 심란하게 어설프다. 연말에는 행정자치부가 가축 다루듯 ‘가임기 여성 분포 지도'를 그려 뭇여성들의 분통을 자아내더니, 세밑이 되자 기획재정부는 결혼시 연말 세액을 공제해주는 ‘결혼 인센티브 제도'를 발표해 빈축을 샀다. 50만원 줄게 너는 애를 내놓아라, 뭐 이런 건가.

이 기세면 머잖아 ‘출산기피행위 부담금'이나 ‘독신세'를 걷을지도 모르겠다. 가임기 시민들에게 결혼을 의무화하고 어길 경우 유산 상속 금지 등의 벌칙을 부과했던 로마 초기 제국이나, 각종의 장려정책으로 여성들에게서 일자리를 빼앗고 가정으로 소환해 출산을 독려했던 독일 나치 시대의 풍경도 얼핏 겹쳐진다. ‘가임기 여성 분포 지도' 따위나 그려가며 출산 책임을 여성에게 떠넘긴 채 여성의 몸을 출산 기계처럼 계량화하는 정부의 저 망상이라면 충분히 가능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고령화 탓을 하면서도 뒤편에선 국민연금을 털어 삼성에게 털어준 정부이지 않은가. 어떻게 믿겠는가. 바다에서 아이들을 구하지도 못한 나라에서 아이를 낳으라 윽박지르는 그 몰염치를 누가 수긍하겠는가. 결혼과 임신이 곧 경력단절과 가부장제 스트레스로 직결되는 그 지긋지긋한 성불평등의 개미지옥으로 어떤 여성이 끌려들어가고 싶겠는가. 과잉경쟁의 노동시장 안에서 자기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 가난한 청년들이 ‘출산은 국가경쟁력이다' 같은 빛바랜 낙수효과를 과연 믿겠는가. 요컨대, 여기는 이미 미래를 낳지 못하는 불임의 사회다. 이 정체된 불능의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뒤바꿀 철학이 없는 한, 출산을 채근하는 온갖 말풍선들은 그저 가련한 공염불일 뿐이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질문이 빠져 있다. 이미 지구 생태를 위협할 정도로 인구가 증가했다는 것 정도는 모두가 알고 있다. 기후 변화까지 겹쳐 식량 위기가 바로 코앞에 닥쳤다. 포화 상태의 인구 때문에 이미 사람들은 가열된 노동시장 속에서 콩처럼 볶아지고 있다. ‘왜 아이를 낳아야 하는가'에 대한 이 근원적 질문에 충분히 납득할 만한 답을 내놓지 못하는 출산정책이란 기존 체제와 기득권의 이익을 위한 이데올로기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더 값싼 노동력, 더 많은 수요, 더 많은 자본주의의 노예들.

아이러니하게도 중세 유럽에서 흑사병 때문에 인구가 감소하자 노동자 임금이 두 배 이상 껑충 뛰어올랐다. 삶이 질이 올라갔다. 최근 일본에서도 일자리 경쟁이 줄고 임금이 올랐다. 한국의 경우, 지금보다 인구가 천 만 가량 적었던 1988년경이 가장 호황이었다.

성장이란 미명 하에 무조건 인구가 늘어나야 한다는 저 주류 담론엔 ‘적정 인구'라는 철학이 없다. 인구가 감소하면 세계가 무너진다는 막연한 공포만 존재할 뿐이다. 지금 필요한 건 무턱대고 아이를 낳아야 된다는 당위의 폭력이 아니라 어떤 사회를 만들어야 하는가에 대한 질문 아닐까. 사회적 부를 고루 분배하는 삶, 여성에게 일방의 희생을 전가하지 않는 삶. 아이들의 안전을 보장하는 삶, 노인들이 스스로 꾸릴 수 있는 삶…. 질문을 바꾸면 세계가 변한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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