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2.16 18:51
수정 : 2017.02.16 19:49
이송희일의 자니?
김기춘과 조윤선이 구속되던 1월 21일, 광화문 촛불집회 무대에 독립영화 배급사 ‘시네마달’ 김일권 대표가 올라왔다. 미리 적어놓은 연설문을 뜨덤뜨덤 읽어내려갔다. “촛불이 있는 모든 곳에 카메라가 항상 함께할 것이다”는 마지막 문장에선 목소리가 가느다랗게 떨렸다.
그 모습을 보고, 한국독립영화협회 고영재 대표는 에스엔에스(SNS)에 “누구보다 자존심이 쎈 사람”이라는 소회를 올렸다. 맞다. 그는 누구보다 자존심이 쎈 사람이다. 좀체로 전면에 돌출되거나 존재의 티를 내지 않는 캐릭터다. 그렇게 정물처럼 은근한 그가 촛불집회 무대에 오르리라 예상한 독립영화인은 아마 아무도 없었을 것이다. 울컥, 눈시울이 시큰거렸다. 그를 무대 위로 등을 떠다민 사람이 나였기 때문이다.
한 달 전, 김일권 대표가 시네마달을 정리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내처 사무실에 찾아갔었다. 15년 넘는 세월 동안 장단편 영화들을 감독과 프로듀서 관계로 함께 찍어온 영화적 동지인 나에게까지 자존심 때문에 그런 기미조차 비치지 않았던 그가 내심 미웠다. 정말이냐는 물음에도 묵묵부답, 그저 조용히 시네마달이 소멸되는 길을 선택하고 있었다. 후원 조직이라도 해야 하지 않겠냐는 말에 ‘명분’이 부족하다며 고개를 가로젓는 그였다. 속이 뒤집혀 나도 모르게 큰소리를 내고 말았다. “시네마달이 형 거야? 그냥 망하는 꼴 보고 있으라고?”
사실이 그랬다. 시네마달이 망하면, 8년 동안 월세 한 번 내지 않고 더부살이했던 인디포럼 영화제도 길바닥에 나앉게 되고, 250편 가까이 되는 배급작들도 갈 곳을 잃어버리며, 한국 독립다큐멘터리 배급시장의 한 축도 붕괴되고 만다. 만수산 드렁칡처럼 이리 얽히고 저리 설킨 조막만한 독립영화계에 시네마달의 소멸은 그렇게 파국의 시작을 의미했다. <다이빙벨> <나쁜 나라> <업사이드 다운> 등 세월호 영화들의 연이은 배급 때문에 박근혜 정부의 눈엣가시로 찍힌 것도 환장하겠는데, 악의적인 지원 배제로 폐업하는 거야말로 억장이 무너질 일이었다. 결국엔 박근혜 정부의 블랙리스트 농단이 성공하는 것 아닌가. 게다가 영화계가 입을 상처와 피해는 고스란히 시민들의 손해로 돌아가지 않겠나. 속상한 마음에 “형은 그냥 가만히 있어!”라고 소리치며 사무실을 박차고 나와버렸다.
바로 뒤미처, 독립영화인과 인권단체들에 시네마달 폐업 위기 소식을 타전했다. 모두가 망연한 표정들이었다. 왜 그러지 않겠나. 세월호, 쌍용, 밀양, 강정, 한진, 내성천…. 남들이 애써 보려 하지 않는 가장 처연한 곳들의 이야기들을 꿋꿋이 노래하던 확성기가 사라질 운명이니까. 이렇게 질 순 없다는 공감대 속에서 후원을 위한 공동연대를 서둘러 조직하고, 스토리펀딩을 오픈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그때서야 김일권 대표가 대중들 앞에 느린 공룡처럼 모습을 드러냈다. “20년 넘게 이 사업에 종사해왔지만 이런 일을 겪은 적은 없었어요. 정말 무서운 일입니다.” 통신사 <아에프페>(AFP)와의 인터뷰에서 밝힌 속내였다. 그 무서움을 홀로 삼킨 채 소멸하려던 그가 마침내 촛불집회 무대 위에 올라와 마음을 다잡고 재기의 의지를 토로했던 것이다. 바로 그게 눈시울이 붉어진 이유였다, 깊은 안도의 한숨과 함께.
그리고 뒤이어 들려온 소식. 특검의 공소장에 기재된 블랙리스트 피해사례 374건 중 하나가 바로 나였다. 영화진흥위원회 예술영화지원사업에서 연출자의 ‘진보적 성향’ 때문에 배제됐다고 또박또박 적시되어 있었다.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지인이 적선해준 쌀 20㎏로 간신히 버티며 썼던 시나리오였다. 그 가난의 쌀알들을 모두 게워내고 싶을 만큼 웃음이 나왔다. 아무리 블랙리스트 권력이 예술가들의 몸을 옥죌 순 있어도 영혼마저 족쇄 채우진 못할 것이다. 바야흐로, “나를 죽이지 못하는 것은 나를 더 강하게 만든다”는 니체의 격언이 소환되는 계절이다. 그렇다. 시네마달은 다시 재기할 것이다. 나는 죽지 않을 것이다. 우리 가난한 딴따라들은 더욱 강해질 것이다. 아직 불러야 할 노래들이 켜켜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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