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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03.30 20:25 수정 : 2017.03.30 20:50

이송희일의 자니?

“동성애를 반대한다는 말은 나에게 쓸데없이 무의미한 말로 들린다. 그건 마치 지금 내리는 비를 허용하지 않는다는 말과 같다.”

영국 보수당의 프란시스 모드의 말이다. 1998년, 동성애자들의 정부 관련 직업을 금지하는 법안이 논의되자 단칼에 일축하며 이렇게 말했다. 하늘에서 내리는 비를 당신이 반대한다고 멈추겠는가. 또는 찬성한다고 비가 더 내리겠는가. 내리는 비와 같은 실존적 양태인 동성애를 지지하거나 반대한다는 말의 그 형용모순을 꼬집은 것이다. 그런데 프란시스 모드는 뼛속까지 보수당 정치인인 데다, 마거릿 대처 정부 때는 ‘섹션 28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인물이다. ‘섹션 28 법안’은 동성애에 대해 공개적으로 긍정적 견해를 밝히는 행위를 금지하는 조항이었다. 갑자기 왜 태도가 바뀌게 된 걸까.

남동생 때문이었다. 무대 연출가였던 남동생이 1996년 에이즈로 죽은 이후 그의 생각이 급격히 바뀌게 되었다. 가장 아끼던 동생이 게이라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고, 죽기까지 2년 가까이 병상에서 그를 간호하면서 세계를 보는 관점이 뒤집혀진 것이다. 찬성표를 던졌던 ‘섹션 28 법안’ 때문에 남동생과 성소수자들이 힘들어했을 거라는 생각에 자책과 후회를 반복했다. 까맣게 모르고 있었지만 바로 지척에 존재했던 자신의 동생같이, 성소수자는 모든 곳에 산개하고 지천에 널린 보편적인 실존의 양태임을 깨달았던 것이다. 마치 하늘에서 내리는 비처럼, 때가 되면 스스로 피는 봄꽃처럼.

최근 한국 정치인들, 특히 주류 야당 정치인들은 극우 기독교 앞에서 “동성애는 지지하지 않지만”이라고 간증해왔다. “여성을 지지하지 않지만”, “흑인을 지지하지 않지만”과 같이 괴이쩍은 표현이다. 과연, “이성애를 지지하지 않지만”이라는 말이 가능한가? 섹슈얼리티는 주체를 구성하는 불가역의 실존적 조건이다. 누군가의 실존을 ‘지지와 반대’로 구획지을 수 없다. 물론 사회적 합의 대상도 아니다. 당신 이성애자는 사회적 합의의 결과물인가?

누군가의 실존을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 그건 ‘나는 당신이 없는 존재라고 판결한다’는 추방의 선언이다. 고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지만, 차별을 받아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는 말은 자기모순에 빠진 아둔한 표현이다.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가장 근원적 차별에 동참하면서도, 한편으론 차별하지 말아야 된다는 빈 껍데기의 당위를 슬쩍 얹어 비판을 모면하려는 알량한 제스추어에 불과한 것이다.

지난 20년 넘게 한국의 성소수자 진영이 펼쳐온 ‘가시화 운동’을 송두리째 모멸하는 반동의 언어. 적어도 김대중, 노무현 정부 때는 이렇게 노골적인 자기분열의 언어는 없었다. 설령 2007년 차별금지법 제정 논란 때부터 극우 기독교 세력이 생존 전략 차원에서 반동성애 기치를 높여왔다고 해도, 소위 진보를 표방하는 야당 정치인들의 줄지은 투항은 그저 기이하기만 하다. 최종적으로는 30년 전 영국의 ‘섹션28’이나 최근 러시아의 ‘동성애 선전 금지법’처럼 담론적 층위에서 성소수자 존재를 아예 삭제하려는 한국 기독교 세력의 준동 앞에서 ‘동성애를 지지하지 않는다’는 말로 그 기세에 날개를 달아주는 행태는 어쩌면, 그간 10년 동안 보수 세력에 잘 보이기 위해 무던히도 애쓰느라 정작 중요한 진보적 가치를 망실했던 주류 야당의 모순적 행태가 응축된 결과일지도 모른다.

못내 불안하다. 조기 대선을 앞두고 ‘정권교체’와 ‘장미대선’이 요란하게 호명되는 계절이지만, 장미, 그 인권의 상징이 과연 꽃피게 될까. 자명하게도, 그 장미가 필 때까지 봄은 멀었다. 민주주의도 멀었다.

이송희일 영화감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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