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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7.14 20:29 수정 : 2016.07.15 14:49

권혁란의 스리랑카 한국어 교실

새벽 여섯 시도 안 되어 눈을 뜬다. 너무 부지런해졌다. 스스로도 놀랄 만큼 의아한 이 근면, 성실한 생활태도는 인도양 바다에 뜬 아침 해가 첫새벽부터 눈부시게 환한 탓도 있지만, 사실은 밤 생활이 한국에 살 때와 달리 투명할 정도로 건전한 까닭이다. 스리랑카에 오면서부터 밤 문화라고 이름 붙일 모든 유흥과 여가생활을 접어야 했다. 아니 수도 콜롬보를 떠나 스리랑카 가장 남쪽 어촌 탕갈레로 오면서부터 그렇게 됐다.

콜롬보와 탕갈레는 네 시간이면 닿을 거리지만 같은 나라가 아니라고 보는 게 맞다. 이곳엔 갈 만한 책방도 없다(내가 읽을 만한 책을 팔지 않는다). 극장도 없다(인도 영화나 스리랑카 영화만 튼다. 자막도 없다). 술집도 없다(음식점에선 오로지 음식만 판다). 결정적으로 만나서 놀 친구도 없다.

하루 동안 흘리는 땀이 거짓말 좀 보태 맥주 한 병을 넘을 정도, 늘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시원한 맥주 한잔이 간절하다. 맥주 정도는 술이 아니라 음료수라고 강변하면서 마시고 싶어도 구입 자체가 여의치 않다. 술은 철창이 굳게 쳐진 ‘와인 스토어’에서 팔고 있는데, 이름만 번듯한 그곳은 ‘생선시장’과 함께 절대 여자가 가지 말아야 할 장소다. 갓 잡아온 생선을 파는 새벽 ‘파시’(시장)에 여자를 보낸다는 것은 아버지나 남편 같은 남자의 무능을 만천하에 알리는 셈이다. 만약 여자가 갔다면 남편도 아버지도 없이 뱃사람과 생선 값을 흥정해 먹고사는 억척스럽고 불쌍한 사람이 된다. 와인 스토어는 더하다. 스리랑카의 어떤 여자도 철창 앞에 서서 술을 사지 않는다. 어부보다 더 거칠고 눈이 빨간 남자들이 ‘씹는담배’를 피처럼 이 사이로 뱉으며 술가게 앞에 어슬렁거리고 있을 뿐이다. 외국인 여자는 괜찮다는데, 똑같은 외국인에 여자인 나는 사실 서양 여자 여행자보다 더 눈에 띈다. 무슨 통신망이 연결되었는지 탕갈레에 사는 모든 사람이 내가 ‘벨리아타 기능대학’의 ‘한국어 선생님’이라는 것을 다 알고 있다. 그리하여 타의 반, 자의 반 품행방정한 ‘요조숙녀’가 되어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들어오면 그대로 두문불출. 침묵수행, 면벽의 시간을 보내게 된다. 할 일이라곤 다음날 수업 준비와 외장하드를 뒤적여 오래된 영화를 보거나 빌려온 책을 읽을 뿐이니, 건전할 수밖에, 일찍 깰 수밖에. 살이 빠질 수밖에 없고 심지어 어쩔 수 없이 훌륭한 교사가 될 수밖에 다른 도리가 없다.

일곱시 조금 넘으면 ‘양산’을 쓰고 ‘원피스’를 입고 한국어를 가르치러 길을 나선다. 이 두 품목도 한국에서는 단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던 것들이다. 스리랑카 사람들 중에 백내장이나 녹내장 환자가 많은 것은 속절없이 쏟아지는 자외선 가득한 햇살을 무방비로 받은 탓이라는데, 아무튼 검정우산이라도 쓰지 않으면 아침부터 눈이 부셔 길을 걸을 수 없다. 평생을 청바지와 면바지, 티셔츠로만 다니다가 하늘하늘한 원피스로만 입성 자체를 바꾼 것도 햇볕과 더위 때문이다. 조금만 걸어도 그야말로 팬티까지 축축하게 젖어버리는 열대의 나라에서 살아남기 위한 스타일 변경인 셈이다. 보이시와 매니시 룩으로 평생을 살았던, 자주 술집에서 날밤을 새웠던, 야근과 폭식으로 세월을 보냈던 한 사람이 10㎏이나 살이 빠져서 오후 5시 이후에 밖에 나가면 큰일 나는 줄 아는, 스리랑카 기준 ‘하얀 피부’의 ‘조신한 여자’가 되기까지는 채 3개월이 걸리지 않았다.

권혁란 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편집장


현재 코이카 스리랑카 한국어교사. 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편집장. 짧은 여행의 기록 <트래블 테라피>를 펴냈고 <엄마 없어서 슬펐니?> <나는 일하는 엄마다>란 책에 공저자로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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