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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8.11 19:23 수정 : 2016.08.11 19:47

권혁란의 스리랑카 한국어 교실

고용한국어 책거리 파티. 사진 권혁란
한국에 가면 바로 일해요? 훈련을 다시 받아요? ‘딜란’에게 한국어로 천천히 또박또박 큰 목소리로 물었다. 두세 달 배웠으므로 싱할라어(스리랑카어)로 말할 수도 있지만 이 구역에선 유일한 원어민 한국어 교사니까 일부러. 며칠 동안 받아요? 딜란은 돌연 손가락을 꼽으며 대답했다. 열 손가락을 다 펴놓고 시작하기에 한 일주일 정도 되나 보다 짐작했다.

하루 두하루 삼하루 훈련해요. 삼하루 후에 사장님이 (데리러) 와요.

이토록 창조적으로 숫자를 만들어 세다니. 깜짝 놀랐다. 선풍기도 없는, 창문조차 온전한 것이 몇 개 없는 낡은 빨간 공영버스 안에서 우연히 벨리아타 기능대학 한국어반 학생 ‘딜란’을 만났다. 내 학생이긴 하지만 본 적이 거의 없는 얼굴. 학기 중간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던 터라 학생 중 몇몇은 이미 고용한국어능력시험에 합격해서 한국 갈 준비를 하느라 학교에 오지 않았으니까. 딜란이 일할 직종은 ‘어업’. 아이는 한국에 가려면 열흘 동안 받아야 하는 ‘한국 취업자 훈련’을 마치고 오는 길이라 했다. 머리카락이 갓 출가한 스님이나 훈련소에 들어가는 군인보다 짧게 잘려 있었다. 하루 두하루 삼하루. 그럼 4일은, 나흘은, 사하루니? 네하루니? 놀려보려다가 웃음과 말을 삼켰다. 영화 <도희야>에서 막 두들겨 맞던 이주노동자가 떠올랐다. 근심이 가득한 얼굴의 딜란은 스무 살, 한국어를 배운 지 세 달 남짓, 한국어로 무엇을 실수했는지 알아채지 못했다. 인도양 바닷가를 스치며 불어온 바람이 땀방울을 데려갔다. 스리랑카 남쪽 끝, 반농반어 주민의 도시 벨리아타 기능대학에서 한국어 교사로 일한 지 한 달도 안 된 작년 5월의 일이다. 딜란은 하얀 유니폼과 운동화를 신고 한국으로 떠났다. 연이어 마두랑거도, 타랑거도.

현장직무훈련. 사진 권혁란
외국인에게 한국어를 가르치는 일을 해볼까 생각한 것은 히말라야 안나푸르나 트레킹에서였다. 짐을 나눠 지고 같이 걷던 중년남자 포터가 비탈길을 오르느라 헐떡이는 내 옆에서 한국말을 가르쳐 달라고 졸랐다. 일주일 내내. 한국말을 잘하면 포터 말고 가이드가 될 수 있어 수입이 낫다고 했다. 한국 여행객들에게 배운 듯 네팔 글씨가 빼곡한 공책을 내밀었는데 한글은 언감생심, 그냥 음차(音借)한 거였다. 오랫동안 글 써서 먹고살고 책 만들어 마시고 살고 남의 글도 숱하게 고쳐봤으니 한국어 가르치는 일이야 땅 짚고 헤엄치듯 쉽지 않겠나, 생각했다. 목소리도 크고 오래 묵힌 국어 정교사 자격증도 있으니 작히나 좋으랴. ‘먼’ 곳에서 온전히 ‘혼자’ 살면서 ‘일’ 해보고 싶었으므로 어디라도 괜찮았다. 그리하여 스리랑카, 그 옛날 텔레비전 개그프로에서 웃음과 눈물을 섞어 ‘뭡니까? 이게. 사장님 나빠요’를 부르짖던 이주노동자 블랑카의 나라로 날아왔다. 홍차의 꿈 ‘실론티’의 고향, 별빛이 쏟아지는 아름다운 몰디브가 코앞이고 스님이 대통령 정도로 대우를 받는 매우 불교적인 나라에서 한국어 교사가 되었다.

코리안드림을 품고 공부하는 학생들. 사진 권혁란
한국어를 가르치는 것은 전혀 식은 죽 먹기가 아니었다. 익히 아는 한국어 문법 지식이나 맞춤법은 거의 쓸모가 없었다. 내 학생들은 100% 한국으로 일하러 가려는 남자아이들뿐. 어서 돈을 벌어 집을 짓고 차를 사고 결혼하고 싶은 열여덟 살에서 스물다섯 살까지의, 까만 얼굴에 속눈썹이 예쁜 30명의 청년들을 앉혀놓고 고용한국어를 가르쳐야 했으므로. 망치 호이스트 농약 거푸집 프레스기계 밀링머신 같은 스스로에게도 낯선 단어들을, 휴가를 주세요, 월급을 주지 않아요, 몸이 아파서 병원에 가야 해요, 같은 서글픈 문형을 외우게 했다.

아무튼 작년 5월, 3년 계약으로 한국 어촌에 일하러 갔던 딜란은 세 달 후 스리랑카로 되돌아왔다. ‘저는 한국에 안 있었어요. 물에 있었어요’라고 말하면서. 무슨 사연일까. 떠날 때에 비해 살이 내려 홀쭉한 얼굴이었다.

권혁란 코이카 스리랑카 한국어교사·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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