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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09.29 19:54 수정 : 2016.09.29 20:20

권혁란의 스리랑카 한국어 교실

닐루샤와 기샨의 집, 한국에서 번 돈으로 이 집을 짓고 트리윌을 샀다.
부동산중개인도 복덕방도 없는 탕갈레 바닷가 마을에서 2년 동안 살게 될 집을 구해 준 사람은 아짓 씨. 한국에서 6년 동안 일한 후 현재, 바퀴 세 개짜리 ‘툭툭’이 아닌 ‘진짜 택시’를 모는 사람이다. 유창한 한국어를 구사하며 자기 택시에 태워 데려간 곳이 닐루샤 씨와 기샨 씨 부부의 집. 모두 한국에서 일할 때 만난 사이란다. 부부는 없고 안경을 쓰고 웃통을 벗은 채 책을 읽고 있는 남자가 있었다. 집주인 동생이었다. 이곳에서 처음으로 안경 쓴 사람을, 책 읽는 남자를 보았다. ‘지적인 풍모’가 사뭇 신선해서 마음이 설??? 여주인 닐루샤 씨도 만나자마자 바로 한국말로 인사해왔다. 남편보다, 시동생보다 훨씬 한국어가 능숙했다. 명민해 보이는 눈빛과 작은 얼굴에 총기가 넘쳤다. 발음도 목소리도 정확하고 밝았다.

일사천리, 계약을 맺었다. 부부가 한국에서 주야장천 같이 일해 벌어온 돈으로 지어 올린 이층 집 거실 플라스틱 책상에 앉아 있노라면 간혹 내가 있는 곳이 한국인가, 스리랑카인가 헷갈렸다. 아이 세 명이 암마, 땃따 하고 부르는 소리가 그냥 엄마, 아빠처럼 들렸다. 부부 모두 오랜만에 한국말을 사용하고 싶은 것인지 나만 보면 싱할러어를 전혀 쓰지 않아 더욱 그랬다. 종종 스리랑카 과일이나 음식을 들고 올라온 닐루샤 씨는 반말로, 밥 먹었어? 잘 잤어? 라고 말을 걸었다. ‘요’를 붙여야 한다고 가르쳐 주었다. 왜 5, 6년이나 한국에 살았으면서 높임말 사용이 이리도 형편없는가, 궁금했는데 답은 스스로 풀었다. 아무도 이들에게 존댓말로 말한 적이 없었을 터였다. 아무튼 닐루샤를 싱할러어 선생님으로 채용했다. 어차피 심화학습비를 사용해야 했고 어차피 학생을 가르치려면 싱할러어를 배우는 게 나 또한 시급했으니까.

벨리아타 한국어 교실 학생들, 여자는 한명도 없다.
닐루샤는 현재 서른아홉 살. 갓 스무 살에 한국어는 단 한 마디도 모르는 채로 한국으로 갔다. 공장에서 일하면서 같이 일하는 한국 사람들한테서 어깨너머로 한국어를 배웠다. 싱할러어 선생님으로 ‘모신’ 후에야 닐루샤가 말은 유창할지언정 한글은 거의 쓰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스리랑카 사람이니 싱할러어를 잘한다 해도 외국인인 나에게 가르칠 정도의 문법 실력은 안 된다는 것도 알게 됐다. 닐루샤는 도리어 내게 한국어를 배우고 싶어했다. 가르치는 사람과 배우는 사람이 뒤바뀌고 알아야 할 언어가 뒤바뀐 이상한 수업을 계속했다. 닐루샤는 몇 마디 싱할러어 용법을 가르쳐주다가도 돌연 한국에서 배운 트로트를 구성지게 불러 젖히며 어떠냐고 물어봤다. 시어머니와 함께 사는 게 얼마나 힘든지, 시동생의 연애가 계층문제로 복잡하다는 것까지 모두 한국말로 토로하며 수업시간을 채웠다.

두 달 동안의 내 싱할러어 수업은 그렇게 끝이 났는데 그 후, 닐루샤는 내가 가르치는 한국어 교재를 갖고 싶어했다. 기초 <한국어 첫걸음>과 <열린 한국어 1, 2, 3권>을 선물했다. 간절하게 한국어 공부를 하고 싶다고 했다. 벨리아타 기능대학에 입학해서 정식으로 내 학생이 되고 싶다고도 했는데 안타깝게도 우리 학교에선 여학생을 뽑지 않았다. “선생님처럼 한국어 선생님이 되고 싶어요.” 닐루샤는 말했다. “잘 배우면 선생님처럼 스리랑카 사람들한테 한국어를 가르치면서 돈을 벌 수 있어요.”

아이들 셋과 남편과 시어머니, 시동생까지 건사하며 한국어교사의 꿈을 키우는 닐루샤(뒷줄 오른쪽). 스무 살에 한국에 가서 일하고 온 씩씩하고 똑똑한 스리랑카 여자다.
여섯 살짜리 아들, 여덟 살짜리 딸, 열 살짜리 큰아들까지 세 명의 아이를 기르고 있는, 장가 안 간 시동생에, 가만히 앉아 있기만 하는 시어머니까지, 아직 일이 없는 남편까지 건사하며 살림을 하고 있는 닐루샤는 어찌나 당찬지. 급기야, 콜롬보에 있는 한국어교실에 등록을 했다. 일주일에 한 번, 고속버스는 못 타고 노멀 버스를 타고 콜롬보로 가서, 다시 학교까지 가는 데 일곱 시간 정도. 새벽 세 시, 잠결에 대문을 열고 깜깜한 밤길로 심야버스를 타러 나가는 닐루샤의 발걸음소리를 듣고 깰 때가 있다. 토요일 새벽이다.

권혁란 코이카 스리랑카 한국어교사·전 페미니스트 저널 이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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