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2.02 19:39
수정 : 2017.02.02 19:58
권혁란의 스리랑카 한국어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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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타라 우산족.그늘 하나도 없다. 오직 우산 하나뿐. 바다와 우산과 연인만 있으면 된다. 스무 살 즈음 청춘들의 사랑의 현장. 사진 권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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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레 요새의 성곽 틈새. 바다를 향해 넓은 창을 낸 카페처럼, 속삭일 수 있는 작은 방처럼. 세계문화유산은 사랑의 장소가 되었다. 사진 권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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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이 정말 한 군데도 없다. 한 구멍마다 딱 두 명의 남녀가 빠짐없이 들어가 있는데 붙어 앉은 두 사람 사이도 물샐틈없다. 뭇사람들의 시선과 열대의 태양 볕을 가리는 것은 오로지 여자가 준비했을 조그만 우산 하나. 앞은 망망대해, 짙푸른 바다 빛과 새하얗게 밀려오는 파도뿐. 세계문화유산에 빛나는 갈레 요새(Galle Fort)에 가면 언제든지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조망과 감시와 포탄설치용으로 오래전에 만들어진 수십 개의 성곽 틈새는, 현재 스리랑카 남쪽 연인들을 위한 작은 카페로 신장개업한 셈이다. 물론 에어컨도 아이스커피도 달큼한 음악도 없다. 요새의 벽돌이 방을 만들어주고 우산이 지붕을 만들어준다. 이들이 소위 ‘우산족’이다. 옛날 한국의 ‘아베크족’의 스리랑카 버전이다. 비가 내려도 햇살이 뜨거워도 우산이나 양산을 사용하는 이가 드문 이곳에서 우산은 연애하는 여성이 챙겨야 할 필수품목이다. 남자가 우산을 사용하는 것은 연애할 때뿐이다. 우산 한 개만 있으면 젊은 연인은, 어디든지 둘만의 공간을 만들어 낸다. 우산족이 연출하는 풍경의 백미는 마타라 해변이다. 나무 한 그루 없이 광장처럼 광활한 텅 빈 바닷가에는 마치 전선줄에 줄지어 앉은 새들처럼 쌍쌍의 남녀가 우산 하나를 쓴 채 기나긴 시간 데이트를 한다. 비가 오지 않는데 우산을 펼쳤다는 것은, 여긴 우리만의 집이라고 선언하는 것과 같다. 그들의 손에는 스마트폰도, 영화도, 게임도, 책도, 음식도 쥐어져 있지 않다. 정서와 분위기를 도와줄 그 어떤 것도 없는 땡볕 속 풍경은 카페, 맛집, 영화관, 술집 등을 순례해야, 연애중이구나, 싶은 일상을 보아온 사람의 상식으로는 너무 단출해 어이없을 정도다. 곁가지 하나 없이 하늘로 뻗쳐오른 코코넛나무만큼 명료하다. 종종 진한 스킨십도 나누는 백주대낮 우산 속 연인들을 보노라면 그들은 내가 도달하지 못한 수승한 도의 경지에 이른 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돈이 없어도, 땀이 줄줄 나게 더워도, 사랑을 도와줄 그 어떤 매개물이 없어도 우리는 사랑하고 있다, 고 온몸으로 말하고 있는 것 같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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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무 살 즈음의 스리랑카 젊은 남자들. 한국어반 우리 학생들은 아직 직업도 없고 돈도 없고 집도 없지만, 데이트는 한다. 뜨거운 나라에서 더욱 뜨겁게. 사진 권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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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애와 사랑이 절체절명의 과제인, 우산족의 대부분은 우리 반 스리랑카 학생들의 나이, 즉 20세 전후의 청춘들이다. 아직 직업이 없는데다, 돈 벌 길도 막막한, 사실 백수와 다름없지만 그것이 연애하지 못할 이유는 아니다. 수업할 때 너무 더워서 문을 열고 수업을 하노라면 옆 교실 여학생들이 지나갈 때마다 내 학생들의 눈은 여자들을 쫓아가느라 허둥지둥하기 일쑤다. 단어 ‘여자’를 배울 때면 진짜 몸까지 배배 꼬고 얼굴이 빨개진다. 결혼도 일찍 한다. 잘 나오던 학생이 출석하지 않아 물어보았더니, 이미 결혼을 했단다. 마두러와 켈룸의 나이, 스물한 살! 스물두 살! 신부의 나이는 더 적다. 이른 결혼의 이유는 ‘좋은 사람을 만나면 빨리 잡아서 같이 살아야 한다’는 명쾌한 결론. 맞춤한 직장이 없어 직업 포기, 돈이 많이 들어 연애 포기, 결혼도 포기, 아이 낳기도 포기한, 3포를 넘어 ‘멀티포기 세대’라는 한국의 젊은이들에 비하면 이들의 낙관적인 실행력은 참으로 놀랍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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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행사에 참여한 여학생들. 스무 살도 안됐지만, 머지 않아 결혼을 하게 될 것이다. 금방 엄마도 되겠지. 사진 권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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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식을 한 후 신혼여행을 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몰디브가 코앞이지만 허니문 여행자는 외국 사람일 뿐. 곧 아기를 낳는다. 피임도 하고 터울 조절도 한다지만 아기를 많이 낳는 것은 당연한 기쁨이다. 육아의 풍경은 우산족과 비슷하다. 한국의 보통 엄마들이 사용하는 수많은 육아용품들을 사용하는 사람은 없다. 보행기, 유모차, 카시트, 놀이기구 같은 것은 정녕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등에 업는 포대기도 앞으로 안는 띠조차도 없다. 연애할 때 우산만 있으면 되었듯이 엄마 아빠의 맨손만이 육아용품과 육아도구의 전부다.
혼밥, 혼술, 싱글, 무직, 만혼, 저출산, 육아의 고통(으로 인한 자살)에 이르기까지 어쩌면 처연한 한국 뉴스의 키워드를 한국 문화라며 가르치는 2017년 2월 현재, 스리랑카 젊은이들은 거침없이 혼자가 아닌, 둘의 연애와 결혼과 육아의 현장으로 뜨겁게 달려가고 있다.
권혁란 코이카 스리랑카 한국어 교사,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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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에서 하루 종일 치르는 결혼식. 스무 살은 조금 넘었던가. 어린 신부는 부모에게 절하면서 울고 여동생을 껴안고도 조금 울었다. 사진 권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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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품이 유모차. 업을 띠도 보행기도 포대기도 유모차도 스리랑카에서 단 한번도 본 적 없다. 사진 권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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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사람의 손에는 음식도, 스마트폰도, 책도, 음료수도 들고 있지 않다. 그냥 두 사람의 눈빛만. 사진 권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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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티칼로아 강가의 연인들. 극장도 식당도 카페도 가지 않는다. 두 사람이 앉으면 그냥 거기가 데이트 장소. 사진 권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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