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3.16 19:28
수정 : 2017.03.16 20: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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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산과 사람이 아름다운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 내 학생들에게 부디 예의바르고 멋진 남자가 되라고 부탁하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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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란의 스리랑카 한국어 교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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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다와 산과 사람이 아름다운 불교의 나라, 스리랑카. 내 학생들에게 부디 예의바르고 멋진 남자가 되라고 부탁하고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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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토바이에 탄 덩치 큰 남자 하나가 속도를 줄이면서 슬금슬금 옆을 따라왔다. 사람의 보폭과 바퀴의 속도가 비슷해졌다. 오, 너희들 섹시한데. 좀 도와주려고 하는 거야. 내 오토바이 탈래? 해 떨어진 지 한 시간쯤 지난 시간, 가로등이 드문데다 불빛마저 흐릿해 헬멧 속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에빠.” 우리는 동시에 싱할러어로 말했다. 에빠는 ‘싫다, 필요 없다, 하지 말라’라는 넓은 뜻을 가진, 아주 경제적인 ‘거부’의 말이다. 더 세게, 더 크게 사용하면 ‘꺼져’라는 의미까지 표현할 수 있다. 우리는 한국 여자 셋이었다. 오토바이는 단 한 대, 혼자였다. 도대체 그 남자는 누구를 향해 섹시하다고 중얼거리고, 도대체 누구를 오토바이에 태워, 어디로 가서 무얼 하자는 수작인가. 젊은 후배들이 더욱 유창하고 단호한 싱할러어로 “그냥 네 갈 길 가라”고 소리친 후에야 느물거리던 그 남자가 천천히 떠나갔다. 얼마나 여자들이 무섭지 않으면, 어떤 마음을 먹으면 이른 저녁에, 관광지 거리에서, 세 명씩이나 함께 걷는 여자들을 향해 희롱을 해 볼 염을 냈을까. 불쾌를 넘어 어처구니가 없었다. 후배들은 한두 번 겪는 일이 아니란다. 두 명은 이십대로 내 딸들 나이다.
다음 날. 예의 두 명과 콜롬보를 걸을 때였다. 훤한 대낮. 마주보는 방향에서 걸어오던 일군의 남자들 중 하나가 가운데 걷고 있는 후배 어깨를 탁 치면서 어쩔래, 뻔뻔한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길은 넓었다. 그나마 앞가슴을 치고 가지 않아서 다행이랄까. 뒤늦은 상황파악 후 돌아보니 그 남자도 멀어진 상태. 젊은 후배는 오래도록 언짢아했다. 혼자 다닐 때보다 여자 후배들과 같이 다닐 때 더 많이 성희롱을 당했고, 목도했다. 그들의 집적거림은 거리에서, 버스에서, 기차에서, 트리휠에서 간단없이 이어졌다. 엉덩이를 치고 가기, 만지고 가기, 손님으로 태우고는 모르는 길로 달려가 공포감 조성하기, 걸어갈 때마다 ‘헬로 치나’ 또는 ‘니하오’로 말을 걸면서 온몸을 훑어 내리는 눈빛, 버스 안에서 노골적으로 몸을 문대거나 허벅지에 손을 대는 일, 팔짱을 껴서 손을 엮고는 숨긴 손가락으로 옆자리 여자의 가슴께나 허리를 만지는 일들이 부지기수로 벌어졌다. 나이 많은 나도, 시니어 어르신도 피해가지 못했다. 나이에 따라 빈도와 강도에서 차이는 날지언정 스리랑카에서 ‘동양 여자’라는 사실만으로 만만하게 취급당하는 것은 예삿일이었다. 스리랑카 상당수 남자들에게 외국 동양 여자는 거의 모두 중국 여성으로 입력된 모양이지만 아무튼 중국 여성이라 해도 그렇다. 왜 민소매에 쇼트 팬츠, 깊게 파인 원피스, 미니스커트를 입은 서양 여자(피부가 하얀)에게는 꼼짝도 못하면서 갈색 피부의 여자들에게만 함부로 구는가. 야한 옷차림과 조신하지 않은 태도가 성희롱과 추행을 유발한다는 말도 안 되는 논리로 봐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서양 여자 여행자의 자유분방한 옷차림과 태도에 비해 한국에서 온 우리들의 옷차림은 과민할 정도로 보수적이고 소박하다. 섹시함이나 어려 보이는 것을 최대한 원천봉쇄하는데도 불구하고 외국인 동양 여성은 가장 손쉬운 희롱의 타깃이 된다. 쏟아져 들어온 중국 기업이나 인력과 함께 유입된 성매매여성이라 생각하고 ‘넌 얼마냐?’고 물어보는, 못된데다 못난 놈들도, 거리에서 껄렁한 짓을 하는 남자들도 거개가 내 학생 또래들이다. 교실에서야 순진하고 순수한 얼굴로 앉아 있지만 밖에서 어떤 짓을 할지는 알 수 없는 일. 사실 이들의 희롱과 추행은 좀 소심하고 용렬한 편이어서 도대체 그 행위로 인해 어떤 쾌감을 느끼는지 모르겠다. 손가락 끝으로 여성의 엉덩이나 가슴께를 깨작거리면 몸의 어느 부분이, 주름진 뇌의 어디가 기쁨으로 작동하는 것일까.
여자에게 불쾌감과 모욕을 주고 얻게 될 남자의 쾌락이 얼마나 수치스러운 것인가에 대해 수십번을 가르쳤다. 차선책으로 <킹스맨: 시크릿 에이전트>를 보여준 후 ‘Manners maketh man’을 표어처럼 칠판에 써 놓았다. ‘예의가 멋진 남자를 만든다’는 한국어와 함께.
권혁란/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코이카 스리랑카 한국어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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넓은 강가에서 코끼리를 목욕시켜주는 저 남자들의 손짓. 아무 도구도 없이 그저 손으로 물을 끼얹어주는 모습은 오래 바라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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겪어보면 순진하지만 덩치 큰 어른 남자인 이 학생들이 여자들에게 어떤 행동을 할 지는 모르는 일, 부디 멋진 남자가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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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간 리본을 맨 하얀 교복의 소녀들. 이 어린 소녀들이 희롱당하지 않고 제대로 사랑받고 사는 세상이 오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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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심하기를. 예의가 멋진 남자를 만든단다. 기도가 일상인 아이들이지만 아직 어떻게 여성을 사랑해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배우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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