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08.03 18:57
수정 : 2017.08.03 19:07
권혁란의 스리랑카 한국어 교실
“한국말 나쁜 말 가르쳐 주세요.” 간신히 가나다라 떼고 기초 동사, 형용사를 배울 때였다. 띄엄띄엄 문장을 만들기 시작했을 뿐인데, 느닷없는 요구였다. 나쁜 말?! 싱할러어로 ‘나라까이 와차너’는 그저 ‘나쁜 말’이란 뜻이다. “개○○, 우리 사용할 수 있어요?” 한 학생이 부끄러운 듯 말을 뱉자마자 미친 ○, 지○, 죽인다! 등. 어디서 들었는지 이 학생 저 학생 마구 나쁜 한국말을 주워섬겼다. 싱글벙글 웃는 얼굴에 서툰 발음으로 한국 욕을 서로 주고받는 모습이라니. 먼저 한국에 취업해 나간 친구들이 말해줬다고 했다. 한국에 오면 제일 많이 듣는 말이라고 했다나. 왜 나쁜 말을 배우고 싶어요? 욕을 배워야 일할 때 사장님 같은 한국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다고 했다. “모르고 가만히 있으면 바보가 돼요.” 자못 진지한데다 걱정이 많았다. 그리고 일리 있는 말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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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 기초단어, 동사 형용사를 가르치고 난 후 내 준 숙제를 해왔다. 공책에 열 번 씩 눌러쓴 글씨가 인쇄한 것처럼 깨끗하다. 사진 권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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욕. 습관적으로, 남들도 하니까,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남들이 만만하게 볼까 봐, 누군가를 무시하거나 비웃기 위해 사용하는 말. 한국에서야 어린아이부터 어른들까지 무시로 욕을 한다. 한국영화를 틀어주면 욕이 쏟아져 나온다. 또래들끼리라면 친하니까 쓰기도 할 테고 ‘욕쟁이 할머니’는 이물 없고 정다운 사람을 일컬을 정도로 쓰이는 게 욕이지만 힘들고 더럽고 어려운 일을 하러 한국에 간 외국 이주노동자들에겐 다른 맥락으로 쓰일 것이다. 무시와 경멸, 모욕을 넘어서지 않을 터. 아무튼 욕은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모두 뇌에 상처를 입는다고 들었다. 착한 사람들이 많은 스리랑카라고 욕이 없을 리 없다. 먼저 ‘꺼져!’라는 이 나라 나쁜 말 ‘발라얀’을 학생들에게 배운 후 저 위 한국 욕들의 뜻을 알려주었다. 한국 사람이 욕하고 때리면 어떻게 해야 해요? 재차 물어왔을 때 대처법을 알려주진 못했다. 욕하고 때리지 않는 좋은 한국 사람도 많다고, 이제 그런 사람들은 없을 테니 걱정 말라고 다독여 주었을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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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6년 한국문화축제에 참가한 벨리아타 우리 학생들. 한복을 입어보고 한국음식을 먹어봤다. 오매불망 어서 한국에 가기를 기다리며 공부하고 있는 중. 사진 권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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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말들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아름다운 한국어 문장을 읽어주고 싶었다. 가능하다면 시도 노래도 소설도. 자료들을 외장하드에 차곡차곡 담았다. 희고 예쁘고 날씬한 아이돌의 뮤직비디오, 한국 문화와 역사를 담은 다큐멘터리, 곱디고운 동요와 동화까지. 도시의 문화센터나 도서관, 대학교나 관광청으로 파견되었다면 요긴하게 사용되었을 그것들은 우리 교실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수도 콜롬보에서 멀리 떨어진, 반농반어 종사자가 태반인 스리랑카 최남단 벨리아타에서 한국어를 배우려고 온 내 학생들은 고용허가제 한국어능력시험에 합격하기만을 원했으니까. 한국어와 한국문화를 공부할 유복한 유학생 지망자는 한 명도 없었다. 일할 때 알아야 할 말과 먹고 살기에 필요한 생존한국어를 속성으로 족집게 선생처럼 가르쳐 주는 것이 훌륭한 한국어교사가 되는 길이었다. 교육과정은 철저하게 고용한국어 시험일을 기준으로 돌아갔다. 학생들은 비싼 돈을 들여 여권을 만들고 밤을 새워 줄서서 시험에 접수했다. 욕도 열심히 배우고 면접용 자기소개도 달달 외웠다. 비싼 돈을 내고 사설한국어학원에 다니는 학생도 많았는데 오륙 년 일하고 돌아온 스리랑카 사람이 한국어선생이었다. 시월 어느 날, 일 년에 한 번밖에 없는, 학생들의 일 년 노력을 평가하는 고용한국어 시험 감독을 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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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편단심 고용허가제 한국어능력시험 응시생들. 기초과정 3권까지 떼고 책거리 파티를 했다. 이제 한국 갈 날이 멀지 않았다. 사진 권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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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시생 3만여 명. 합격자는 4000명 남짓. 경쟁률이 엄청 세다. 밤을 도와 버스를 타고 와서 한 데서 아침을 맞은 응시생도 많았다. 시험은 모두 70분. 듣기, 읽기 영역 25문항씩 모두 50문제를 풀어야 한다. 시험지를 펼치고 덜덜 떨며 긴장한 저 많은 사람들은 모두 내 학생들이나 마찬가지다. 에어컨 없는, 섭씨 30도를 윗돌아 문을 죄다 열어놓은 수십 개의 교실에서 몇 초의 간격을 두고 한국어 듣기문제가 우렁우렁 울렸다. 흘낏 봐도 틀린 곳에 답을 표시하는 사람이 부지기수다. 아. 안타깝지 그지없다. 네팔, 인도네시아, 캄보디아, 미얀마, 방글라데시 등에서 치러진 2016년 한국어능력시험에서 업종별 커트라인이 가장 높았던 부문이, 스리랑카의 제조업 시험이라고 했다. 30명, 백퍼센트 내 학생들이 거기에 속해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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콜롬보 골페이스 바닷가에서 한국 사람을 발견하고 달려온 스리랑카 청년들. 많은 청년들이 외국으로 일하러 나간다. 사진 권혁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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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혁란 전 페미니스트저널 <이프> 편집장, 코이카 스리랑카 한국어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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