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내마음속 도서관
전우치전·최고운전조상우 지음, 김호랑 그림/현암사 펴냄(2013) 초등학생 시절에는 ‘우리나라’라는 개념이 당연하게 여겨졌지만, 나이 들수록 ‘우리나라’라는 개념은 복잡한 이해관계로 얽혀 있음을 알게 된다. 신라시대의 문장가 최치원은 ‘우리나라’가 당연하지 않은 시대, 중화주의의 패러다임이 강력하게 지배하고 있던 시대에 저 유명한 <토황소격문>은 물론 중국의 지성들과 당당히 겨루는 글들을 여러 편 남겼다. <최고운전>은 고운(孤雲) 최치원의 실제 면모와 민중의 상상력이 어우러져 만들어진 작품이다. 중국의 황제는 신라에 천재적 문장가가 있다는 소문을 듣고는 그를 시험해보기 위해 갖은 묘수를 짜낸다. 최고의 학자들을 신라에 보내 최치원의 문장을 실험해보기도 하고, 절대로 부서지지 않는 함을 만들어 보내놓고 ‘이 함에 들어 있는 것을 맞히지 못하면 공격하겠다’는 엄포를 놓기도 한다. 최치원은 중국의 횡포로 신음하던 조국을 여러 번 곤경에서 구해주고, 그것도 모자라 중국의 황제와 독대까지 하여 황제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버린다. 황제의 계속되는 부당한 요구를 참을 수 없게 된 최치원이 중국을 떠나려 하자, 황제는 엄포를 놓는다. 네가 아무리 신라에서 태어났다고 할지라도, 신라는 나의 땅이고, 너의 임금 또한 나의 신하일 뿐인데, 네가 어찌 나를 업신여기느냐고. 그러자 최치원이 마침내 글자 한 자(一)를 공중에다 쓰고, 그 글자 위에 뛰어올라 턱 걸터앉아서 황제에게 말한다. “그러면 여기도 또한 폐하의 땅이오?” 황제는 그만 혼비백산하여 엎어지면서, 용상에서 내려와 최치원에게 머리를 조아리며 사죄를 한다. 우리 문학에서 이토록 통쾌한 장면이 있었단 말인가. 황제 앞에서 전혀 주눅 들지 않고 자기 할 말을 다 하는, ‘충성’ 따위는 맹세하지 않는 멋진 지식인이 우리에게 있었구나! ‘이 세상 모든 것이 다 내 것이다’, ‘신라도 내 것이고 신라의 임금도 내 신하일 뿐’이라고 뻐기는 황제 앞에서 최치원이 홀연히 붓을 들어 한 일 자를 허공에 휘갈겨 쓰면서, 그 글자 위에 턱 하니 걸터앉아 ‘여기도 황제의 땅이냐’고 묻는 장면은 언제 읽어도 압권이다. 이런 거침없는 상상력이 우리의 것이었다니. 여길 가도 황제의 땅, 저길 가도 황제의 땅이었던 세상. 그 어디든 마음 놓고 ‘내 땅’이라 여기며 발 디딜 수 없는 세상. 그런 중화(中華)의 세상 속에서 ‘진짜 내 것’을 일구기 위해 얼마나 깊은 고민을 했기에 이런 문장이 나올까. 하늘 아래 왜 내 땅은 없는 걸까, 저렇게 많은 집 중에 왜 하필 내 집은 없는 걸까, 하고 서러워질 때 황제를 향한 최치원의 눈부신 도발은 찬란한 위로가 되어줄 것이다. 나는 <최고운전>을 읽으며 ‘진짜 내 것’의 정의를 바꾸었다. 진짜 내 것을 가진다는 것은 법적으로 내 것, 경제적으로 내 것을 소유하기 위해 안간힘 쓰는 것이 아니라 최치원처럼 황제조차도 건드릴 수 없는 ‘나만의 한 일(一) 자’를 허공에 쓰는 것이라고. 복잡할 것도 없다. 한 일 자 하나만 허공에 휘갈겨 쓸 수 있는 담력만 있으면, 우리는 끝내 승리할 것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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