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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6.10.06 19:39 수정 : 2016.10.06 19:48

정여울의 내마음속 도서관

영영이별 영이별
김별아 지음/해냄(2014)

‘한(恨)’이라는 정서는 모든 슬픔을 한 단어로 응축하면서도 동시에 아무것도 제대로 설명해주지 못하는 단어이기도 하다. ‘한’은 ‘민족의 한’, ‘천추의 한’처럼 이상화되고 추상화되기 쉽기 때문이다. 뭔가 구체적으로 설명해주기보다는 ‘그게 다 한이지, 한이야!’라는 식의 환원론에 빠지기도 쉽다. 개인의 슬픔이 ‘한’이라는 차원을 넘어서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한은 원통함과 억울함으로 시작되어 울분과 좌절감으로 끝날 때가 많다. 한은 밖으로 흐르는 감정이라기보다 안으로 고여 있는 감정이기에, 달래고 누그러뜨리기는 더욱 어렵다. 이런 ‘한’의 태생적 폐쇄성을 뛰어넘는 작품이 바로 김별아의 <영영이별 영이별>이다.

단종이 숙부 수양대군에게 왕위를 빼앗기고 비참하게 죽어간 뒤, 단종비 정순왕후는 무려 65년이나 홀로 살아남아 82살까지 이곳저곳을 떠돌며 그야말로 ‘인간이 느낄 수 있는 모든 한(恨)의 결정판’ 같은 삶을 살아간다. 하지만 이 소설은 ‘개인의 한’으로 오그라들지 않고, 원통하게 죽어간 단종에 대한 연민과 수양대군을 향한 저항의 정서를 공유한 모든 사람들의 슬픔을 어루만지는 방향으로 확장된다.

이 소설은 정순왕후의 ‘혼백’의 시점에서 그 파란만장한 역사의 소용돌이를 끝내 견뎌낸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으로 확장된다. 정순왕후의 일생은 열일곱 소년과 열여덟 소녀인 채로 영원히 헤어졌던 두 사람의 애끓는 사랑 이야기로 환원되는 것이 아니라 단종, 세조, 예종, 성종, 연산군, 중종에 이르기까지, 무려 6대 왕의 시대를 온몸으로 살아낸 정순왕후가 목격한 모든 ‘사건’들로 확산된다.

그녀는 그 수많은 사람들이 권력의 암투 속에 서로를 모함하고, 밀고하고, 죽이는 파란만장한 세월을 묵묵히 참아냈다. 다만 꿋꿋이 살아남는 것이 유일무이한 복수의 길이었던 시간을 견뎌냈다. 정순왕후는 단지 꿋꿋하게 살아남은 것에 그치지 않고, 자신만큼이나 가련하고 애통한 사람들, 남편을 죽음에 이르게 한 수양대군을 비롯한 그 모든 배신자들의 삶까지 아우르는 거대한 이야기의 병풍을 자신의 슬픔이라는 바늘로 한 올 한 올 수놓아 간다.

정순왕후는 왕비에서 평민으로 추락한 것으로도 모자라 날품팔이꾼, 걸인, 비구니의 삶까지 견뎌내며 살아남았다. “그녀의 존재를 말하면 사람들은 어리둥절해한다. 세상이 외면했던 65년의 고독을 말하면, 경악한다. 그녀가 움켜잡았던 온기, 이름 모를 여인들의 거친 손을 말하면 눈물짓는다.” 바로 이 공감과 연대의 정서야말로 한의 폐쇄회로를 벗어날 유일한 열쇠가 아닐까. “당신은 전설로 축조된 신비의 왕국에서 어린아이처럼 착한 왕으로 부활하셨습니다. 밟히고 또 밟혀도 잡초처럼 일어나는 만인들 가운데, 타인의 불행을 동정하며 눈물 흘릴 줄 아는 숫백성들의 마음에, 불의를 미워하고 정의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가슴에 당신의 나라는 뿌리를 내렸습니다. 현실에 없는 나라, 잃어버린 나라, 그리하여 더욱 아름답고 슬픈 나라.” 바로 그 영원히 되찾을 수 없는 나라, 잃어버린 나라에 살고 있는 모든 ‘슬픔의 백성들’에게 이 소설은 ‘이제는 함께 울자’며 손을 내민다.

한은 결코 마음에만 고여 있는 것이 아니다. 끝내 ‘나’를 뛰어넘고, ‘우리’의 좁은 경계를 부수고, 도저히 함께할 수 없었던 ‘그들’에게까지 촉수를 뻗어가 결국 ‘더 커다란 우리’로 나아갈 때, ‘한’은 비로소 극복될 수 있을 것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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