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여울의 내마음속 도서관
그랜드 투어설혜심 지음/웅진지식하우스(2013) “저는 여행을 책으로만 떠나요”라고 말하며 수줍게 미소 짓는 독자들이 있다. 사실 나도 그랬다. 책을 통해 많은 여행기를 접하다 보니, 어느 순간 ‘나도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열망에 사로잡히게 되었다. 여행의 역사를 다룬 인문서들과 괴테나 연암 같은 작가들의 기행문을 읽다 보니, ‘삶을 바꾸는 여행’을 향한 욕망이 꿈틀거리기 시작했다. 온갖 나라들의 독특한 여행문화 중에서도 특히 흥미로운 것은 바로 그랜드 투어였다. 설혜심의 <그랜드 투어>는 ‘세계일주를 향한 열망’이 ‘교육’의 측면에서 어떻게 발전해왔는지를 보여준다. 그랜드 투어(the Grand Tour)란 “18세기 유럽에서 어린 청년이 교육의 일환으로 프랑스와 이탈리아 등을 여행하던 관행”을 가리킨다. 영국 상류층은 자식들을 더 넓은 세상, 특히 유럽 대륙으로 보내 우아한 취향과 외국어, 각종 역사와 예술에 대한 교양을 배워오게 했던 것이다. 그랜드 투어를 향한 열망은 곧 유럽 전역으로 뻗어 나갔고, 토머스 홉스·애덤 스미스·볼테르·괴테 등 수많은 지식인이 동조함으로써 ‘엘리트 교육의 최종 단계’로 자리잡게 되었다. 하지만 귀족들의 그랜드 투어는 필연적으로 귀족과 평민 사이의 구별짓기를 낳았다. “진짜 여행은 이제 불가능하다. 이제 오직 관광을 할 뿐이다”라고 탄식하는 사람도 생겼으며, 학자들은 그랜드 투어는 고상한 것, 대중 관광은 천박한 것으로 인식하기도 했다. 당시의 그랜드 투어는 성직자나 동행 교사가 전문적 권위를 가지고 지휘하는 여행이었고, ‘매스 투어리즘(mass tourism)’이라 불렸던 대중적인 여행은 ‘토마스 쿡’ 같은 여행사들이 제공하는 상업적인 여행이라는 식으로 말이다. 하지만 부르주아나 엘리트의 ‘구별짓기’를 향한 열망도 ‘모든 사람이 자유롭게 여행할 권리’를 막을 수는 없었다. 현대 대중판 여행안내서의 발달이 “과거에 ‘볼 수 있던 것(optic, 능동적인 관찰)’에서 ‘보아야 하는 것(gaze, 수동적인 응시)’으로 여행자의 시선을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과거에는 ‘내가 보고 싶은 것’을 보면서 천천히 즐길 수 있었던 여행이, 이제는 여행안내서나 가이드가 ‘꼭 봐야 할 것’으로 찍어준 것들을 중심으로 인증샷을 찍는 여행으로 대체되었다며 비판하는 시선도 있다. 하지만 ‘귀족들과 엘리트들을 위한 여행’으로 만든 프로그램은 오늘날 대중의 패키지여행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으며, 수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비슷비슷한 ‘인증샷’을 찍기는 하지만 저마다의 마음속에서 그 여행은 ‘나만의 특별한 경험’으로 각인된다. 흥미로운 것은 아무리 귀족이나 부르주아들이 ‘너희 평범한 사람들’과는 다른 여행을 하기 위해 그랜드 투어를 만들고, 더 독특하고 희귀한 여행을 개발해도, 결국 대중은 그 비슷한 여행을 그대로 답습하게 된다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누구와도 똑같지 않은, 나만의 특별한 여행’을 꿈꾸는 것은 빈부격차나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 공통의 소망이 되었다는 점이다. 그랜드 투어는 한때 귀족자제들의 교양을 위한 계급적 차별화의 도구였지만, 이제 새로운 의미의 그랜드 투어를 꿈꾸는 현대인들에게 여행은 삶을 바꾸는 창조적 영감을 일구어내는 마음의 보물창고가 된 것이다. 정여울 문학평론가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