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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서영 지음/은행나무(2014) 내 안에서 아직 제대로 깨어나지 못한 잠재력이 ‘꿈틀’하는 것이 느껴질 때가 있다. 감동적인 책을 읽을 때, 간절히 바라던 소원이 이루어지는 순간, 그리고 사랑에 빠져서 좀처럼 헤어나지 못하는 순간이 그렇다. 바로 이렇게 나라고 믿었던 나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을 가능하게 만드는 것이 라캉이 말하는 ‘실재계’의 힘이다. ‘나만 영원히 사랑해줘’, ‘내 생각은 다 옳아’, ‘해피엔딩만 좋아’라고 생각하는 유아적 환상이 ‘상상계’라면, 자신의 모든 현실적 필요를 스스로 책임지는 어른스러운 정신세계가 ‘상징계’, 그리고 때로는 평소에 상상도 하지 못했던 기적 같은 일이 실제로 일어나게 만드는 무의식의 영역이 ‘실재계’다. <영화로 읽는 정신분석>은 이런 라캉의 정신분석과 융의 분석심리학을 융합하여 수많은 영화가 지닌 깊은 치유적 힘을 발굴해낸다. 상상계가 피터팬처럼 어른이 되기를 거부하는 우리 안의 무책임한 순수성을 나타낸다면, 상징계는 언어를 통해 현실을 감당하는 능력, 나아가 인생의 역경조차도 자신이 책임져야 할 일부로 받아들이는 성숙한 어른들의 세계다. 실재계는 나도 모르는 나의 놀라운 힘이 숨어 있는 무의식의 장소다. 운동선수들이 피나는 훈련 끝에 마침내 세계신기록을 세운다든지, 예술가들이 오랜 슬럼프와 고행 끝에 비로소 최고의 영감을 끌어내어 아름다운 작품을 창조해내는 것을 가능케 하는 힘이 바로 실재계에서 우러나온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할 때 이전에는 결코 시도조차 하지 않았던 일이 마치 기적처럼 가능해지는 것도 실재계의 힘이다. 실재계의 빛이 강렬한 만큼 그림자도 강력할 수 있다. 강력한 트라우마가 무의식 깊숙이 잠들어 있을 때 실재계는 그 사람을 끊임없이 가위 눌리게 할 수도 있고 환청이나 환영에 시달리도록 만들 수 있다. 말하자면 실재계는 우리 무의식이 지닌 최고의 잠재력과 최악의 상상력이 공존하는 엄청난 에너지의 장이다. 이 실재계를 어떻게 자극하고 단련하고 연마하느냐에 따라, 인간은 창조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기 안의 최대치를 실현할 수도 있고, 환영에 사로잡혀 최악의 범죄를 저지를 수도 있다. 이 책은 무의식의 무한한 가능성조차 돌봄의 대상, 성장과 치유의 대상이 될 수 있음을 증언한다. 의식의 수면 아래 깊이 가라앉은 무의식의 꿈과 감정과 욕망까지도 소중한 자기의 일부로 보살필 수 있을 때 우리는 자기 안의 최고의 가능성, 즉 융이 말하는 ‘자기 안의 위대한 신화’를 살아낼 수 있다. 실재계의 기적을 일상 가장 가까이서 증언하는 것은 바로 사랑의 힘이다. “사랑의 그 불가사의함, 바로 그것이 미지의 영역인 실재계입니다. 약속을 지켜 내는 사랑, 한번 스쳤을 뿐인데 평생 힘이 되는 사랑, 보이지 않아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사랑, 그것이 실재계적인 사랑입니다.” 나아가 <스타워즈>의 대사, “포스가 함께 하기를.”(May the Force be with you)이야말로 ‘자기 안의 신화를 살아내라’는 융의 메시지와 일치한다. ‘포스’는 곧 자기 안의 무한한 가능성이며, 나 자신을 믿어야만 비로소 발휘되는 무의식의 빛나는 재능이니까. 정신분석이란 바로 내 안의 더 깊은 가능성을 끌어내는 힘, 모두가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할 때조차도 내 안의 최고의 힘을 기어이 끌어내는 용기의 다른 이름이기에. 정여울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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