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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7.12 20:07 수정 : 2018.07.12 20:54

[책과 생각] 정여울의 내마음속 도서관

기억·서사
오카 마리 지음, 김병구 옮김/소명출판(2004)

어떤 책은 숲속의 벤치처럼 달콤한 휴식을 전해주고, 어떤 책은 새로 맞춘 안경처럼 세상을 이전과는 전혀 다른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게 해준다. <기억·서사>는 내게 바로 그렇게 새로 맞춘 안경처럼 삶을 향한 새로운 시야를 열어주었다. 이 책을 읽은 뒤, 기존에 읽었던 이야기들을 떠올려보니 익숙한 스토리도 전혀 다른 풍경으로 다가왔다.

예컨대 <피터팬>에서 후크는 분명 악당이지만, 후크의 입장에서 보면 피터팬은 평화로운 삶을 위협하는 존재이자, ‘나는 늙어가고 있고, 언젠가는 죽을 것이다’라는 어른의 공포를 환기시키는 위험한 존재다. 피터팬은 영원히 늙지 않기에 후크 선장의 이 노화와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결코 이해하지 못한다. 후크의 입장에서 피터는 자신의 뼈아픈 콤플렉스를 더욱 자극하는 얄미운 존재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버나드 쇼의 희곡 <피그말리온>은 신화 속 전설적인 예술가 피그말리온의 입장이 아닌 그가 만든 조각상-여인 갈라테이아의 입장에서 본다면 ‘창조주가 아무리 피조물을 사랑할지라도, 피조물은 창조주를 결코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통쾌한 반전을 선사한다.

이 책에서는 다양한 문학작품을 통해 ‘기억하는 자’와 ‘기억당하는 자’의 필연적인 갈등, ‘기억을 스토리로 만들어가는 주체’의 이기심과 ‘기억에 의해 편집되고 왜곡되는 대상’의 소외를 발견할 수 있다. 가장 오래 기억에 남은 작품은 바로 발자크의 <아듀>라는 작품이었다. 나폴레옹 전쟁이 끝난 후, 남자주인공 필립은 옛사랑 슈테파니를 다시 만난다. 그토록 아름다운 백작부인이었던 그녀는 ‘아듀(안녕)’라는 말만 주문처럼 반복하는 미친 여자가 되어 있었다. 프랑스군이 후퇴할 무렵, 필립과 슈테파니, 그리고 그녀의 남편 방티에르 백작은 러시아군에 포위당했고 나룻배에는 두 사람의 자리밖에 없었다. 필립은 그녀와 그녀의 남편만을 배에 태워 떠나보낸다. 그녀의 기억은 ‘아듀’라고 외치며 연인에게 작별을 고하던 그 시간에 멈춰 있었던 것이다. 탈출 도중에 남편을 잃은 그녀는 적군에게 붙잡혀 2년 동안 적군 부대의 성노예로 전락했다.

필립이 그녀의 기억을 찾아주기 위해 택한 최후의 방법은 그들이 마지막으로 헤어졌던 러시아 평원을 모방한 거대한 세트를 만들어 이별의 풍경을 재현하는 일이었다. 그녀는 극적으로 기억을 되찾지만, 필립이 그녀를 떠나보내는 그때 그 시간을 재현하자마자, 그녀는 ‘아듀’를 외치며 죽고 만다. 기억을 복원하려는 주체(필립)의 이기적 욕망은 기억을 잊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대상(슈테파니)의 마지막 생명줄을 끊어놓고 만 것이다. 그는 그녀의 기억을 되살리는 대가로 그녀를 영원히 잃어버린 것이다.

아무리 감동적이고 위대한 스토리라도 그 안에 사랑이나 증오의 '대상'이 되는 존재의 관점에서는 그 스토리 자체가 폭력이나 억압의 사슬이 될 수 있다. 이 책은 문학작품뿐 아니라 ‘내가 사는 세계’를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주었다. 걸핏하면 상처받고 오해받는 일에 지쳐버린 채, ‘내 감정의 밀실’에 틀어박혀 타인과의 소통으로부터 도피했던 나에게, 내가 아닌 관점에서 사건과 감정을 바라보는 훈련이 필요함을 일깨워주었다. 타인의 아픔을 상상할 수 있다면, 타인에게 상처주는 일 또한 멈출 수 있다. 다르게 볼 줄 알면, 비로소 다르게 살아갈 수 있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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