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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8.09 19:12 수정 : 2018.08.09 19:54

[책과 생각] 정여울의 내마음속 도서관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송영택 옮김/문예출판사(2018)

얼마 전 지인이 나의 문자메시지를 보고 가슴이 아팠다고 말해서 깜짝 놀랐다. 연락을 기다리겠다는 단순한 메시지를 나는 이렇게 표현했다는 것이다. “저는 기다림에 익숙해요. 때로는 기다림 자체가 참 좋아요.” 별다른 감정을 실어 말한 것이 아닌데, 듣는 사람은 가슴이 아팠나 보다. 그런데 나는 정말 때로는 기다리는 일이 진심으로 좋다. 늦은 밤 찻물이 끓어오르기를 기다리는 몇 분의 시간 동안 나는 하루를 찬찬히 되돌아보고, 약속장소에 늦는 상대방을 기다리며 책을 읽느라 잠시 기다림의 지루함조차 깜빡 잊고 책 속의 이야기에 푹 빠져들곤 한다. 이미 완성하여 탈고한 글이 책으로 나오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릴 때도, 그 기다림의 시간이 설레고 두근거린다. 나는 나 자신조차도 기다린다. 지금은 결코 할 수 없는 일을 언젠가는 해낼 수 있을 때까지, 지금 감당하지 못하는 고통을 언젠가는 너끈히 이겨낼 수 있을 때까지. 나는 나를 기다린다. 더 치열한 나를, 더 깊고 너른 나를.

기다림이 힘든 순간은 기한과 목표가 확실히 정해져 있는데 시간은 미치도록 모자랄 때다. 새로운 아이디어가 떠올라야 일이 진행될 텐데, 아이디어는커녕 사소한 문장 하나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요새 그런 강력한 슬럼프를 겪으며 불현듯 이 책을 꺼내들었다. 머리를 긁적이며 시인이 내게 진심어린 말을 걸어올 때까지 기다려보았다. 수많은 문장들이 뇌를 자극했다. 특히 고독에 대한 시인의 문장이 가슴을 할퀴었다. “당신의 고독이 크다는 것을 깨닫는다면 기뻐하십시오.” “고독의 성장은 마치 소년의 성장과 같아서 고통이 따르고, 봄이 시작될 때처럼 서러운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에게로 침잠하여 몇 시간이고 아무도 만나지 않는 것,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안 됩니다.” 릴케는 고독을 반드시 지켜내야 할 소중한 보물처럼 조심조심 다룬다. 나는 그의 문장을 읽으며 이 힘겨운 고독 속에서 반드시 무언가 빛나는 창조의 불꽃을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기 시작한다.

나는 절대적인 고독 속에서 자기 안의 가장 빛나는 용기를 찾아낼 수 있으리라 믿는다. “우리가 만나게 될지도 모르는 가장 기묘한 것, 가장 기이한 것, 가장 해명하기 어려운 것에 대해 용감해야 합니다.” 또한 고독 속에서 환상을 체험하는 것이야말로 창조성의 뿌리가 된다는 것을, 변함없이 믿는다. “‘환상’이라고 불리는 체험, 이른바 ‘영계’(靈界)의 세계, 죽음 등 우리와 아주 가까운 이 모든 것이 날마다 생활에서 방지되고 멀리로 밀려났기 때문에, 이것을 포착할 수 있는 우리의 감각이 위축되고 말았습니다.” “당신 마음속의 해결되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해서 인내를 가져주십시오. 그리고 물음 그 자체를 닫혀 있는 방처럼, 아주 낯선 말로 쓰인 책처럼 사랑해주십시오. 지금 당장 해답을 찾아서는 안 됩니다.” “지금은 물음을 살아가십시오. 그렇게 하면 아마도 당신은 차츰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먼 미래의 어느 날, 해답 속으로 들어가서 해답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견디기 힘든 슬럼프가 찾아올 때마다, 나는 머나먼 시간의 늪을 건너 우리에게 찾아온 이 아름다운 시인의 편지를 읽는다. 이 기나긴 우울의 터널이 끝날 때까지, 기다림의 아픔이 창조의 불꽃으로 타오를 때까지, 걷고, 읽고, 생각하며, 기다림의 늪을 견뎌낼 것이다.

정여울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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