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7.10.19 19:56
수정 : 2017.10.19 20:55
13년 전 런던, 윔블던으로 향하는 지하철 안에서 제비 한 쌍을 보았다. 제비들의 시선은 하늘이 아닌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피로한 중년 남자의 무릎 위에 앉아 열차의 움직임에 따라 몸을 움직이던 제비들은, 색이 바래고 윤곽이 흐려진, 양 손등 위의 타투였다. 서로를 꼭 닮으려 노력했지만 실패한 듯 약간은 다른 모습이었고, 주인이 살아온 세월을 그대로 보여주듯 건조한 잔주름이 가득했다. 열차의 문이 열리자 제비들은 작은 동선으로 하강, 상승을 반복하며 주인을 따라 날았다. ‘우리들은 언제나 당신과 함께죠.’ 살갗 위의 새들이 작게 지저귀는 것만 같았다.
“젊었을 때야 문신이 멋지겠지만 나이 들면 얼마나 추하겠냐.”
타투를 조롱하는 이들의 말은 제비 타투에 밀려 설득력을 잃고 말았다. 탄력을 잃은 피부 위의 그림 역시 젊고 팽팽한 몸의 타투만큼 아름다웠다. 긴 세월을 버텨낸 제비들은 주인의 몸과 완벽히 동화되어 있었기에 더 진한 서정을 남겼다.
제비 타투를 본 이후, 나는 미술관이 아닌 살갗에 걸린 작품을 더 유심히 살펴보게 되었다. 그림과 그림의 주인이 어떤 식으로 호응하는지, 구경꾼에 지나지 않는 내가 절대 알 수 없는 숨겨진 서사가 무엇인지, 세월이 흐르면 어떤 식으로 변화할지, 타투에 매혹된 자의 호기심은 끝이 없었다. 내가 직접 그림의 주인으로 살아보기 전까진 절대 알 수 없을 그들만의 비밀인 것 같았다. 나도 공개적으로 전시된 비밀, 아이러니한 몸의 장식이 반드시 갖고 싶었다.
타투이스트가 피부에 그림을 그리는 동안, 고통이 몸과 마음의 통로가 된 듯했다.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조그만 바늘이 살갗에 잉크를 밀어 넣을 때, 나는 그 통로에서 서성였다. 몸이라는 광장에 기념비를 세우는 중이라고, 마음 깊은 곳에 가라앉아 있던 그림이 피부 위로 떠오르는 중이라고 나를 다독였다. 고통 끝에 완성된 타투는 언제나 자랑스러웠고(어설픈 도안마저도) 나는 NO PAIN NO GAIN(고통 없인 얻을 수 없다)의 의미를 체험한 양 히죽댔다.
모든 타투가 고통스러운 것은 아니었다. 양어깨에 연꽃 견장 타투를 받았을 때는 깜박하고 잠이 들어 버렸다. 타투 머신의 소음조차 자장가로 들렸다. 내가 민망한 표정으로 깨어나자 누군가 내게 ‘너 독하구나’ 감탄한 듯 웃었다. 독한 것이 아니라 둔한 것이었지만, 나는 장군처럼 근엄한 표정을 지었다. 새 타투가 내게 준 역할에 충실하고 싶었던 것이다.
나는 ‘우연으로’ 얻은 무지 상태의 몸보다 내가 ‘선택한’ 그림과 함께인 몸을 더 사랑한다. ‘영혼의 그릇인 몸은 영혼을 닮고 싶어 한다’는 기이한 믿음 탓일지도 모른다. 양아치, 깡패, 낙오자… 타투를 향한 성급한 편견에 시달릴 때면, 나는 타인이 아닌 내가, 나의 몸과 삶의 주인이라는 것을 상기한다. 어리석어서 귀엽고 과감해서 대견한 삶의 기록들. 그것들 꼭 붙들고 놓지 않는 내 몸엔 부끄러운 그림이 단 하나도 없다.
정새난슬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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