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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7.12.14 19:38 수정 : 2017.12.14 20:12

[정새난슬의 평판 나쁜 엄마]

친척 동생을 만나 어린 시절의 기억을 들려줬다. 짤막한 에피소드를 끝내며 ‘너도 기억나?’ 물었더니 그는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돌이켜보면 우스운 일이지만 당시 어린아이였던 우리를 불안하게 만들었던 일들. 그때의 감각에 사로잡힌 내가 옛 기억을 줄줄이 꺼내놓자, 그는 처음 듣는다는 듯이 나를 신기하게 쳐다봤다.

“누나 기억력 좋다. 근데 그렇게 많이 기억하고 있으면 피곤할 거 같아.”

과거의 서랍을 헤집고 다니며 뭔가를 공유해 보려고 했던 나의 시도는 가볍게 무산되고 말았다. 유독 갈등에 관련한 기억만을 잊지 않는 피곤한 화자가 되어버렸다. 함께 걸었던 아파트 복도, 보조 바퀴가 달린 자전거, 수영장에서 나눠 먹은 해시 포테이토, 낡은 드래곤볼 카드, 우리의 어린 시절을 가득 메웠던 귀여운 기억마저 순식간에 사라진 것 같았다. 살짝 섭섭하고도 외로웠다. 그가 기억하지 못하는 유년의 동산에 나 혼자 남아 보물찾기를 하는 기분이었다. 색이 바래고 시시해진 보물들, 달콤 씁쓸한 기억들.

친척 동생의 말을 듣고 나는 방대한 옛 기억들이 나를 피곤하게 만드는지 진지하게 고민했다. 여러 종류의 기억을 검색하며 해로운 것과 즐거운 것으로 나눠 보기도 했다. 도무지 당시의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사건들도 많았다. 감상이 증발한 건조한 기억들은 뼈를 드러낸 채 간략한 줄거리로 남아 있었다. 인제 그만 정리해도 좋을 기억들이 있긴 있었다. 하지만 강렬한 감정의 색이 남아 있는 기억들은 도무지 버릴 수 없었다. 분노, 수치심, 좌절감, 슬픔, 환희, 유쾌함, 설렘 등의 태그가 붙어 기억의 캐비닛 속에 잔뜩 들어 있었다. 언제든 꺼내 읽기만 하면 그때로 돌아갈 수 있는 마법 같은 기억들. 부정적인 감정이 뒤섞인 것들을 골라내 해롭다는 경고를 붙일까 잠시 고민했다. 나를 지배했던 어두운 감정과 기억들을 정리해야, 나는 덜 피곤한 사람이 되지 않을까?

나는 나를 구성하고 있는 서사를 전부 좋아한다. 우울하고 못생긴 기억이라고 멋대로 삭제하거나 발설 금지령을 내리고 싶지 않다. 당시의 감정에 다시금 사로잡히더라도, 이제는 내가 그 감정을 통제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시간이란 약의 효과란 그런 것이다. 한때 지배당했던 감각에 휘둘리지 않고 적정한 선에서 나쁜 기억을 다룰 수 있는 능력이 생긴다. 억지로 쫓아낸 기억들은 갑자기 돌아와 마음을 두드리며 나를 괴롭히게 되어 있다. 차라리 해부하고 관찰할 의도를 갖고 간직하고 있는 편이 낫다. 더는 지배당하지 않기 위해, 뜨겁고 괴로운 기억의 온도를 내리기 위해.

이제는 두 아이의 아빠가 된 친척 동생을 떠올리며 나는 다시 기억의 아카이브를 거닌다. 씁쓸한 기억들은 내 품에 넣어두고, 낙천적인 그를 위해 여리고 다정한 기억만을 골라낸다.

“네가 100원을 하수구에 빠트려서 엉엉 울었던 거 기억나? 리비아에 계신 아빠가 피땀 흘려 번 돈인데 잃어버렸다고 바닥에 주저앉아 울었잖아. 아파트 복도에 귀신이 나온다고 비명을 지르며 함께 뛰었던 일도, 드래곤볼 카드를 팔겠다며 동네를 돌아다니던 일도, 내게 계란 모양 비누를 사준 일도 기억나? 나는 기억나. 하나도 버릴 게 없는 예쁜 기억들이 아직도 나를 웃게 만들어.”

정새난슬 작가·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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