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1.04 19:10
수정 : 2018.01.05 12:21
정새난슬의 평판 나쁜 엄마
아이에게 이를 닦으라고 했다. 이를 닦는 김에 세수를 하라고도 했다. 놀랍게도 순순히 화장실로 들어가는가 싶더니 아이는 치약을 왕창 짠 칫솔을 들고 나와 소파에 누웠다. 졸린데 왜 이를 닦아야 하냐며 항의하는 아이를 안고 화장실로 들어가 대충(이러한 행동 양식은 내 정신 건강에 큰 도움이 되곤 한다) 이를 닦였다. 이 닦임을 당한 아이는 씩씩대며 ‘이걸 과연 세수라고 부를 수 있을까?’ 싶은 세수 흉내를 냈다. 얼굴보다는 옷에 더 많은 물이 묻어 있었다. 그래도 일단 아이 얼굴에 물이 묻었으니 ‘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한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는 아이의 머리를 묶기 위해 텔레비전을 켰다. 지그재그로 타진 가르마를 보며 잠시 휴식(휴전)을 했다. 도발적인 유치함으로 나의 미감을 거스르는, 그러나 딸이 몹시 좋아하는 왕꽃 핀을 꽂아 어린이집 룩을 완성했다. 뿌듯한 마음이 앞선 나는 만화 보느라 정신이 팔린 아이에게 멋지다며 칭찬을 했다. 아이는 자기가 정말 멋진가 확인하려고 거울을 봤다. 그리고 곧 나는 아이의 주의를 돌린 것을 후회했다.
“아니, 라푼젤처럼 묶어주라고!”
“너 단발이잖아.”
“그래두!”
“짧아서 안돼.”
“그래두! 그래두!”
그래도도 아닌 그래두. 아이는 ‘그래두’가 마법의 단어라도 되는 듯이 반복해서 외쳤다. 안되면 되게 하라! 짧은 머리도 순식간에 자라게 만드는 신공을 펼쳐라! 비현실적 요구가 어이없었으나 응해주는 수밖에 없었다.
“손님, 손님 헤어 기장으로 라푼젤 머리는 못하지만 엘사는 가능하겠네요.”
새빨간 거짓말. 나는 딸의 머리를 다시 묶는 척, 마음에 없는 콧노래를 부르며 ‘어머 엘사랑 똑같다!’ 손뼉을 쳤다. 손거울을 든 딸은 매우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엄마, 나 진짜 엘사랑 똑같네.”
‘정녕 그런가요? 아까랑 똑같은데...’ 나는 혼잣말 한 뒤 어깨를 떨며 웃었다. 실체보다 관념이 중요했던 아이의 어린이집 등원 준비 끝. 나는 옷을 챙겨 입으러 방으로 들어갔다. 육체적으로 피로한 것 같진 않지만 정신적 에너지를 많이 소모한 것 같아 옷을 고르기도 귀찮았다. 매일 똑같은, 어쩌면 전생부터 입어 왔을 것 같은 옷을 입었다. 회색 티셔츠 위에 회색 기모 박스 티를 입고 회색 롱패딩을 걸친 뒤 회색 털 모자를 썼다. 잠옷 바지를 그냥 입고 나가고 싶었지만 아이 체면을 생각해 검푸른색 청바지로 갈아입었다. 인간다운가 확인하려고 전신거울을 보다가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거대한 갈치 한 마리가 위풍당당한 모습으로 내 앞에 서 있는 것이 아닌가.
엘사의 이념을 추구하는 딸과 세상을 등지고 싶은 갈치 엄마의 어린이집 등원. 추레한 모습을 감추고 싶어 몸을 배배 꼬는 나를 보며 딸은 친구들에게 큰소리로 외쳤다.
“얘들아, 여기 봐! 우리 엄마야! 이름은 정새난슬이야!”
작가·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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