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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8.04.05 19:07 수정 : 2018.04.05 19:48

정새난슬의 평판 나쁜 엄마

나는 괜찮은데 사람들의 표정은 어째서 엄숙한가. 이혼 3년 차, 나는 ‘과거의 아픔이 뭐야?’하며 멀쩡하게 살아가고 있으며 이혼을 주제로 농담까지 한다. 하지만 아직도 내가 이혼이란 단어를 꺼낼 때마다, 안쓰러운 표정을 짓는 사람들이 있다. 마치 그것이 이혼이란 단어의 반사 작용이거나 예의인 것처럼 말이다. 물론 비극의 당사자는 대화의 주체일 수 있으나, 나머지 사람들은 그 주제에 대해 신중해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사람들의 그런 마음을 다 알면서도 ‘이혼 농담’으로 착 가라앉은 분위기를 감당해야 할 때면, 나는 난감해진다. 나 스스로가 이혼이란 별에서 온 괴생명체 같다. 이혼을 말하는 행위 자체를 나의 과거를 과장하거나 대화 자리에서 튀려는 시도로 보는 거 같아 기분이 찝찝하다. 마음이 삐딱한 날엔 사람들이 억지로 나를 불행한 사람으로 만들고 싶어 하는 듯이 느껴지기도 한다. ‘당연히 이혼 후 네 삶엔 슬픈 이야기밖에 없을 거야, 그렇지?’ 나의 유쾌함을 무시하고 슬픈 이야기만을 기대하는 눈빛들, 언제나 징그럽다.

비교적 짧은(딱히 자랑스러운 건 아니지만) 결혼 생활을 정리한 사람에게, 그것도 3년이나 지난 이혼에서 비극을 기대하다니. ‘사랑과 전쟁’풍의 뜨거운 김이 솟아나는 막장 드라마? 그런 시절이 없었다면 순 거짓말이지만, 이제는 다 끝난 이별이고 매듭지은 감정이기에 농담도 할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전남편이 무자식 상팔자처럼 사는 것이 부러워 배가 아프고, 매우 부조리한 양육비 금액 때문에 화가 나는 날은 종종 있다. 내게 그런 감정들은 이혼으로 인한 슬픔이라기보다 일상의 스트레스에 가깝다. 애증의 감정이 결여된 사무적 분노랄까.

결혼 생활의 힘든 점을 내게만 비밀로 하던 친구도 있었다. 이혼을 주제로 농담이나 하는, 나 같은 사람은 절대로 원만한 결혼을 위해 노력하는 자신을 이해 못 할 거라 확신한 것이다. 그녀는 이미 한참 전부터 나를 ‘이혼 영업’에 뛰어든 세일즈맨 정도로 여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이혼 후의 생활을 즐겁게(항상 슬프지 않은 점 죄송합니다) 광고하며 결혼과 가족의 의미를 무시하는 불온분자….

그런 오해가 싫으면 네가 이혼에 대해 말하지 않으면 되잖아? 남편이었던 사람과 헤어진 것은 옛날이지만, 이혼이란 상황은 내게 일상이다. 이혼 후 건설된 삶, 정확히는 이혼 후 주 양육자가 된 상황이 내게 일상이다. 친구들과 만나서 나의 일상에 대해 말하지 못한다면 그것이 더 부자연스러운 거 아닐까. 떠들면 떠들수록 이혼에 편견이 옅어질 거라 믿는 내가 이상한 걸까.

나는 사랑했었던 사람과 헤어졌을 뿐, 범죄를 저지르지 않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혼을 숨길 이유가 없다. 엄숙히 금지할수록 이혼이란 단어는 내 안에서 더 높이 솟구칠 뿐이다. 이혼은 나를 구성하는 인생 경험 중 하나일 뿐이지, 침묵으로 지킬 비밀이 아니지 않은가. ‘죽은 관계가 낳은 새 삶’으로 크게 웃어보고자 농담하는 나는, 살짝 경박(유쾌)할지언정 결코 슬픈 사람이 아니다.

정새난슬 작가·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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