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8.04.19 20:59
수정 : 2018.04.19 21:08
정새난슬의 평판 나쁜 엄마
늘 토요일 저녁만 되면 속이 울렁거린다. ‘절대 그럴 리 없어’ 와 ‘혹시 또 몰라’ 사이를 번갈아 출입하는 마음이 피로하다. 내게 흐르는 긴장감을 공유하려 아빠를 쳐다보지만, 나보다 침착한 아빠의 얼굴엔 변화가 없다. 인형을 잔뜩 안고 돌아다니는 딸과 나를 한심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엄마를 뒤로하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지갑을 꺼낸다.
지퍼에 찢겨 가장자리가 엉망이 된 로또, 너절한 모습인데도 내겐 절대 반지처럼 보인다. 검색창에 ‘로’를 치니 자동완성으로 로또 당첨 번호가 뜬다. 나와 같은 사람들…. 그들은 이 검색창에 얼마나 자주 떨리는 마음으로 ‘로’를 쳤을까. 갑자기 뭉클해진다. 감상에 젖어 있노라면 왠지 위엄 있어 보이는 숫자들, 범상치 않은 번호들이 내 눈앞에 나타난다. ‘과연 행운의 주인공은? 당신의 운명은?‘ 상상 속 내레이션. 나는 책상에 굴러다니는 볼펜을 잡아 로또 위의 숫자를 동그라미로 포획할 준비를 한다.
포획할 숫자가, 없다. 하나도 없다. 아, 가슴 언저리를 누르는 묵직한 슬픔. 당첨 번호와 너무 달라서 느끼는 아픔. ‘아버지, 제가 또 소중한 5000원을 날렸네요.’ 나는 날 바라보던 엄마의 표정을 따라 하며 터덜터덜 거실로 돌아간다. 아빠가 웃고 있다. 혹시 또 몰라서, 나는 아빠에게 승패를 묻는다.
“아빠! 로또 어떻게 됐어? 뭐가 되긴 했어?”
“되긴 뭐가 돼. 맨날 꽝이지.”
“근데 왜 웃었어…?”
“응? 또 꽝이라서.”
또 꽝인 게 재밌다니 아빠는 절박하지 않구나. ‘아버지, 제게 대체 왜 그러세요. 로또 된 줄 알고 설레었잖아요.’ 살짝 짜증을 내고 싶지만 참는다. 아빠와 내가 로또를 사는 이유가 다르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한다. 자본주의가 지긋지긋하다는 아빠는, 손쉽게 자본을 얻어 자본주의의 충실한 구성원이 되려는 나를 위해 로또를 산다. 아빠 인생의 최대 모순이 바로 나라는 사실을 확인할 때마다 씁쓸해지지만, 나는 세속의 노예로서 아빠에게 충고한다.
“꽝이 웃기면 아빠는 로또를 사면 안돼. 간절함이 없잖아. 간절함.”
내게도 간절함은 없다. 허황된 당첨 판타지가 있을 뿐이다. 1미터 목줄 인생, 집 주변만 빙빙 도는 시골 개 생활을 청산하고 너른 벌판으로 날듯이 달리고 싶다. 당첨금이란 슈퍼 파워를 부여받기만 하면 내게 새로운 경험과 기회가 충만한 인생이 활짝 열릴 것만 같다. 가성비 따지다 취향이 사라지는 소비는 굿바이, 죽기 전에만 어떻게든 가보자던 여행 렛츠 고! 그리고 무엇보다, 내가 낳은 딸을 오롯이 내 돈으로 키우는 당당한 경제적 자립…. 로또 당첨금이 예전 같지 않다지만 나의 ‘위시 리스트’ 중 단 하나라도 이룰 수 있다면 그게 어딘가.
또 꽝, 늘 꽝. 당첨 번호라곤 하나도 없는 복권이 쓰레기통으로 사라질 때면 나의 판타지가 와해되곤 하지만 나는 계속 로또를 산다. 가끔은 로또에 당첨되기 위해서가 아니라 전혀 다른 삶을 상상하기 위해서, 상상의 연료로서 로또를 구입하는 것 같다. 자유를 횡재 맞고 싶은 마음의 탈출구가 필요하기 때문이다. 잘 모르는 조상이 꿈에 나타나 상서로운 숫자들을 귀띔해 주길 바라며, 나는 춤도 흥도 없는 토요일 밤의 횡재를 애타게 기다린다.
정새난슬 작가, 일러스트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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